마케팅 페르소나 이해 4
고객을 가장 깊이 이해한 사람이 시장을 바꾼다
시간이 지나 가락시장에서의 위장 취업(?)은 그만두었다. 나를 고용해 줬던 사장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고 사장님께서는 의미 있는 일을 한다며 지원을 약속해 주셨다.
이제는 더 이상 밤을 새 과일을 옮기지 않아도 되지만 종종 가락시장에 들러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번째 프로덕트 개발이 끝나면 영업을 해야 했기에 인맥도 쌓을 겸 부단히도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즈음 도매시장 사장님들이 쓰고 있는 한 소프트웨어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OO넷"이라는 이름의, 생전 처음 들어보는 수발주 프로그램이었다. 투박하지만 정확했고, 상인들이 현장에서 쓰기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이었다.
농산물 유통이란 분야가 진입 장벽이 있고 성공적인 안착이 어렵다 보니 경쟁사가 많지 않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분야가 겹치는 선배 스타트업들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꿰고 있었다. 하지만 시장에서 본 그 회사의 이름과 프로덕트는 1년이 넘은 시점에서도 한 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한국 농산물(청과물) 유통 구조도나는 바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고, 운영 중인 회사의 블로그와 몇몇 PR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회사의 창업자는 가락시장 수산동에서 25년을 일하신 중도매인이셨다. 25년이면 가락시장 내에서도 길게 일한 축에 속한다. 아주 오랜 기간 그 시장의 구성원이었고, 시장과 함께 인생을 살아온 분이었다.
어려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이들이 모두 다 커 있더라고요. 밤새 일만 하느라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요....(중략) 저로 인해 시장의 상인들에게 삶의 여유를 주고 싶었습니다. 시스템을 바꿔보자! 현장에서 IT를 접목해 장부정리 업무가 빠르게 끝나게끔 바꿔보자! 생각했죠.
OO넷 대표님의 인터뷰 기사 중 일부 내용을 따와 각색한 내용이다. 시장 상인의 삶을 수십 년간 살아온 분이고, 나 역시 잠깐이나마 동고동락 했었기에 그 말이 진실되고 꾸밈없음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해결하고자는 문제(Problem)는 우리와 다를 게 없었다. 팜도라 역시 상인들이 장부 정리에 소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좀 더 생산성 있게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는 천지차이였다. 시장 곳곳에서 상인들은 OO넷 프로그램을 쓰고 있었고, 내가 여쭤볼 때마다 "이거 너무 좋다", "일이 편해졌다"라며 칭찬하셨다.
가락시장에서 수발주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모습그분이 만들고자 했던 건 '혁신적인 도매 유통 시스템'이 아니었다. 단 하나, 한 시간 더 빨리 집에 가는 것. 그 단순하고 절실한 바람이 시작점이었다.
우리와 문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팜도라 역시 수기로 작성되는 장부를 디지털화해 시간을 줄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OO넷은 시장에서 ‘정말 잘 쓰이는 툴’이 되었고, 우리는 첫 제품을 피벗하며 방향을 바꿨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든 걸까?
나는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왜(WHY)가 다르다
▶ 팜도라 : “농산물 유통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이루자” → 그러려면 거래 데이터가 필요하다 → 데이터를 수집하려면 장부를 디지털화해야 한다 → 수발주 프로그램을 만들자
▶ OO넷 :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집에 가고 싶다” → 시간을 줄이려면 장부 정리를 바꿔야 한다 → 상인들이 쓰기 쉬운 프로그램을 만들자
우리의 Why는 산업적 구조를 보는 데서 시작했고, OO넷의 Why는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됐다.
결국 이건 고객 페르소나 이해의 깊이 차이였다. 그저 고객의 직무(Task)만이 아닌 고객의 시간(Time), 피로(Fatigue), 관계(Relationship), 삶(Life)까지 이해할 수 있었느냐의 문제였다.
나는 과일 유통업을 하시는 형님의 제안으로 팜도라를 창업했다. 농산물 유통 생태계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자료 조사를 해보니 잠재 기회가 보였다. 농산물 유통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고 지금 올라타면 꽤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를 해결했을 때 창출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도 컸기에 명분도 있었다.
OO넷의 대표님은 도매시장의 중도매인으로 25년을 일했다. 수십 년을 새벽에 일하다 보니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시장 안의 다른 상인들도 똑같이 힘든 삶을 살고 있다. 상인들을 위해 한 시간이라도 일찍 집에 갈 수 있도록 돕는 소프트웨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IT 회사를 창업했고 수발주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수많은 책과 강의에서 ‘페르소나를 파악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장은, 정말 제대로 파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결과로 가차 없이 가른다.
당시 농산물 유통업계에도 멋진 스타트업들이 꽤 있았다. 수천억 원 대의 가치를 평가받은 유니콘급 스타트업도 있었다. 모두 멋진 기업으로 훌륭한 창업자와 구성원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시장 내에서 탄탄하게 성장중인 OO넷만큼 진정성 있는 회사를 보지 못했다
사업을 하며 많은 고비가 있었고, 나는 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 시기 이후로 질문이 조금 바뀌었다.“왜 이걸 해야 하지?” 고객을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OO넷 대표님의 Why는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우리의 Why는 ‘시장 구조’와 ‘가능성’을 따라갔기에, 늘 방향을 잡기 어려웠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인터뷰를 떠올린다. 진정성 있게 고객을 이해하고 그 Why를 바탕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사람이 시장을 바꾼다. 나는 그걸 직접 보고 배웠다. 그래서 실패에도 후회가 없으며, 지금도 가장 즐겁고 유의미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