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던 고무장갑에 구멍이 났다. 설거지하는 내내 물이 장갑 안으로 들어왔다. 버리고 새로 사야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머릿속에 온통 고무장갑 생각뿐이었다. 고무장갑 하나를 위해 나갈 수는 없으니 나간 김에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나갈 때마다 까먹었고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을 때마다 '아차' 했다. 그리고 드디어 3일 만에 자주(JAJU) 매장에 갔다가 날 끌어당기는 영롱한 빛깔의 다크그린 고무장갑을 발견하고 고민 없이 집어 들었다.
고무장갑 하나 새로 샀을 뿐인데 기분이 좋은 건 왜일까. 구매에 3일이나 걸려서?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다크그린 컬러라서? 아니면 착용감이 너무 좋아서?(이상하게도 착용감이 좋았다) 아마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다림 끝에 소유하게 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내가 벼르고 벼르던 앞치마를 거의 한 달을 고민하고 샀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이해가 간다. 저렇게 좋아할 일인가 하며 의문을 품었던 나였다. 그런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으면, 다크그린 고무장갑이 싱크대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걸 보고 이 세상 설거지는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말 사람은 단순하다.
돈이 많아서 이런 것들을 고민 없이 사들이면 이토록 기쁘진 않았을 것 같다. 항상 어떤 물건을 살 때 가격을 떠나 아끼고 기다렸다가 비로소 절실할 때 가지게 되면 마치 배고플 때 먹는 라면처럼 행복했던 것 같다.
약간의 노력과 사소한 주변 것들로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데 여태 너무 모르고 산건 아닐까. 삶이 팍팍해서 이 기쁨이 금세 잊힐 것 같지만, 고무장갑 한 켤레로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