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행기 안 -
한국 시간 12시 55분
프랑스 시간 4시 55분
모로코 시간 9시 55분
지금부터 9,600km를 날아가면
경유지인 파리에 도착할 것이다.
영문판 LONELY PLANET 한 권과
3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던져준
퇴직금 600만 원 외에
의지가 될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숨 쉴 틈 없던 일상으로부터
잠시 멀어져 있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반드시 이루고 말 테다 하는
목적 따위도 없었다.
사실, 이 여행의 돛은
꽤 오래전부터 올려져 있었다.
그저 그 돛을 밀어줄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그러던 어느 날
모로코 전통 옷 차림으로
낡은 분수대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세 할아버지의 흑백 사진 한 장.
그리고 쫓기듯 살아온 나를 돌아보게 한
저 짧은 글귀가 날 힘차게 떠밀어주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바람이 일었다.
가서 그동안 죄어왔던
스스로를 펼쳐 보이고
이곳저곳 흘러 다니다가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이 여행은 스스로에게 허락되었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 양귀자 '모순'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