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흔적을 남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라캉의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비롯된 욕망을 가진 것 같지만, 사실 사회적, 관계적으로 요구된 것들을 자신도 모르게 욕망한다는 뜻이다.
내게도 엄마의 욕망을 욕망해서 꿨던 꿈이, 친구의 욕망을 욕망해서 가졌던 목표들이 있다. 이 문장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사회적 관계에 엮여있는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인생은 마이웨이.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며 여러 번 다짐했지만 이젠 인정한다. 나 역시 주변 영향 엄청 받는다는 걸.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때던 때가 기억난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행정학과로 전공을 선택했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과는 정반대의 학과였다. 과 특성상 모두가 공무원을 꿈꾸고 있었고, 그 업을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환경에 있을 때 나는 점점 공무원이 되고 싶었고, 그보다 좋은 직업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로 고민을 한참 하다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새삼 집단의 힘을 깊게 느꼈다.
영국을 좋아하는 친구의 영향을 받아 영국으로 단기 어학연수를 떠나기도 했고, 글쓰기에 꽤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삼촌의 말에 힘을 받아 꾸준히 써왔다. 너는 두상이 커서 배우가 될 수 없다는 지인의 말에 배우의 꿈을 접기도 했고, 일단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친구의 모습에 나 역시 끝까지 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의 욕망과 생각을 접할 때마다 비슷한 꿈을 꾸거나 삶의 진로를 완전히 바꿨다. 사람뿐 만이 아니다. 별생각 없이 틀었던 영화는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양을 늘리게 했고, 인상 깊게 읽은 책은 20대 초반을 지탱하는 삶의 철학이 되었다.
심지어 잠깐 소개받았던 오빠가 알려준 다이어트 비법은 꽤 오랫동안 나의 습관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결국 나는 다른 사람의 흔적이 담긴 나였다.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생엔 나보다 몇 수 앞서 나간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내 삶도 업그레이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고민은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는 거였다. 내 기억엔 항상 유난 떨며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그대로였다. 좌절하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삽질만 하고 시간을 보냈다.
그때 친구는 나에게 자신의 언니를 소개해줬다. 친구의 언니와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나는 처음으로 내 공부법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분의 공부비법을 전수받아 지속적으로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좋은 기회와 운은 사람을 통해 들어온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돌이켜보면 신의 한 수였던 순간들은 모두 사람을 접하면서 열렸다. 그렇기에 내가 만나는 사람, 읽는 책, 커뮤니티 등 내게 오는 모든 것이 너무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만나는 사람을 바꾸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결국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내가 되니까. 그들이 하는 말들, 품는 욕망, 꿈의 높이, 삶을 보는 태도가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니까.
내가 동경하는 위치에 가 있는 사람을 만나 어떻게든 접하고,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혼자 삽질하며 보내는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단축시킬 수 있다.
여전히 온전한 내가 되길 꿈꾸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는 존재라는 걸. 인간은 생각보다 유약하고 다른 사람의 욕망을 쉽게 내면화한다는 걸. 그렇기에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멋진 사람을 지속적으로 만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오늘 밤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나를 더욱 확장시키는 사람을 만나고 있나? 아니면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내 세계를 점점 작아지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