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별 Nov 14. 2023

H라인 치마를 입고 울다

나에게 꼭 맞는 삶이란

치마를 안 입은 지 얼마나 됐지. 아마 4년 이상 되지 않았을까 싶다. 종종 입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바지의 압도적인 활동성에 익숙해졌기에 오늘도 통바지를 입고 외출했다.


내게 어울리는 옷은 무엇일까?


20살 때 H라인 치마가 유행이었다. 테니스 스커트도 유행이었는데, 나의 체형 단점을 부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H라인 치마를 더 즐겨 입었다. H라인 치마는 허리를 드러내주고, 두툼한 허벅지를 보완해 주었다. 지하상가에서 샀던 회색 치마. 꽤나 잘 입고 다녔다.


그 치마는 나와 어울렸지만, 최적의 옷은 아니었다. 그 옷을 입을 때마다 나는 흐읍-하며 호흡을 참고, 배딱지를 등에 붙여야 했다. 힘겹게 옷을 착용해도, 계속 배에 힘을 주고 돌아다녀야 했다. 옷이 불편하니 어느 순간부턴 입지 않았다. 결국 그 치마는 자크가 터져 운명하게 되었다.


H라인 치마는 입은 나는 예뻤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그때 찍은 사진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보인다. 배를 쫑겼던 불편함까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널널한 통바지처럼 살과 옷 사이의 적당한 거리가 있을 때, 그 여유가 내게 편안함을 준다. 편안함을 느끼면 행복하다.




요즘 난 진지해졌다. 엄마에게 내가 느낀 생각의 변화를 말해주면 엄마는 사춘기라 이야기한다. 10대 때도 사춘기라며 가족들이 뭐라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건 그냥 사는 게 힘들었던 거였다. ‘내 마음은 아무도 몰라’하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건 아니다. 그냥 자우림의 노래를 듣다 ‘가난한 나의 영혼에~’라는 가사에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인다.


살아갈수록 자기를 안다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나이 먹는 건 나쁘지 않다.


나를 알아가 보니 난 그렇게 활발하지도,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소수여도 단단하고 확실한 관계, 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사람 몇 명이면 충분했다.


그걸 알고 나니 많은 사람을 웃기고 싶은 욕망도, 눈치보며 맞추고자 했던 노력도 사라졌다. 옛날에 비하면 점점 노잼이 되고 있는 것이다.


노잼인간. 근데 그거 아실련지. 너무 편안하다. 내게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언젠가 오랜만에 만났던 룸메는 말했다. 왜 이렇게 조용하고 차분해졌냐고. 근데 기숙사에서 새벽에 대화했던 텐션의 너라고. 그땐 몰랐는데, 이게 너의 진짜 모습 같다고. 그 말이 왠지 모르게 힘이 되었다.


오랜만에 통화했던 istp 친구도 내가 우울할 때 조용해서 참 좋다고 했는데. 역시 나는 입을 다물 운명이었던걸까.


H라인 치마를 입었던 때는 많이 울었다. 대부분 타인에게 맞추려다 실패해서 울었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했던 나인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려 했는지 모르겠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나 자신에게 미안할 짓을 많이 한 것 같다.




이제 나는 H라인 치마를 입지 않는다. 타인에게 맞추려고 지나치게 나를 깎아내리지도, 타인이 나를 규정한 말에 옛날만큼 상처받지도 않는다.


20살부터 방황하며 채워갔던 나의 시간들이 설명해 준 내가 있다.


그 시간들을 믿고,

앞으로 쌓아갈 시간들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성형 할까 말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