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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 Mar 03. 2021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을 때

눈을 건네고 마음을 쓰는 사람들

언제 살아있다고 느껴?
내가 있음을 알면서 타인이 있고 세상과 이어져 있다는 걸 알아차려?
나는 요새 그런 걸 잘 모르고 살았어.
근데 다시 살게 됐다. 세상 속에 나를.



퇴근길에 한번, 산책길에 한번. 하루에, 무려 두 번이나, 마음에서 행동을, 행동에서 손을, 건네받았다.-반점은 강조하고 싶을 때 찍는 거라면, 강조가 지나쳐서 너무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반점을 썼어. 강조, 강조하고 싶거든.- 지나가던 행인 1이었던 나, 나로 가득 차서 남을 보지 않고 살았던 나야. 혼자 자기 길 가기 바쁜 사람을 보고 마음을 건네던 그들의 다정함 덕분에 내 밤이 생생해졌어. 또렷하게 기억나. 따듯해. 덕분에 한 발자국 뗄 수 있었어.


 급한 마음으로 퇴근을 했고 버스를 타고 싶은 마음에 472번을 타고 순천향대병원 정류장에서 내렸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미세먼지 '최고 좋음'이었기 때문에 남산타워도 하늘도 파랗게 보였어. 숨을 크게 한번 쉬고 육교를 건넜지. 산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인가? 잘 기억이 나질 않네. 144번으로 환승해서 블루스퀘어를 지나는 길. 버스는 꽤 차 있어서 승객들은 양쪽으로 손잡이를 잡고 서있었어.

 나도 얼른 창밖 구경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섰지. 남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나는 나로 가득 찬 상태였거든. 오늘 하루를 잘 마무리할 방법만 생각했어. 노이즈캔슬링으로 외부를 차단하고 경쾌한 음악을 흘려보내면서 이동한 것 같아. 시선은 창밖으로 놓고, 손은 버스 손잡이를 꽉 잡고. 그 외에는 신경 쓰질 않았어. 그렇게 힘을 꽉 주면서 동시에 주변 풍경들을 통과하면서 서있던 걸로 기억해.

 그런 나한테 한 여성분이 말을 거는 거야. 아마도 날 부르셨을 텐데 귀를 꼭 닫아놓은 덕분에 듣질 않았어. 그러고 난 후일까? 그분이 나에게 손을 흔들어 가방이 열렸다고 말해줬어. 너무너무 고마운 순간인데, 난 그보다 먼저 깜짝 놀랐어. 헐, 설마. 하면서 -나는 카메라 가방으로 나온 백팩을 메고 다니는데 위, 아래로 열리는 구조야. 아래가 열려있으면 물건을 잃어버린 건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정말 허겁지겁 가방 아래쪽을 확인했지.- 가방을 봤어. 아찔했지. 아래쪽 지퍼는 닫혀있었어. 정말 십년감수했어. 그래서 어디가 열렸는지 몰랐는데, 그분이 허둥지둥 대는 나에게 와서 열린 지퍼를 닫아주시더라. 멍했어. 감사하다는 말만 겨우 했어.

 근데 내가 언제부터 열고 다녔는지 잘 모르겠어. 출근길부터 퇴근하는 버스까지 내내 많은 사람이 나와 지나쳐갔겠지만 각각의 이유로, 나 역시 그대로인 채로 흘려보냈을 거야. 혼자서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 특히나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영향을 최대한 막아놓은 내 시간에 그분의 손짓이 훅 들어왔던 거야. 직접 가방을 닫아주시던 그 다정한 마음에 꼭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의 시선 덕에 나는 가방 문을 닫고서 뭔지 모를 뭔가를 받아서 두둥실 집에 도착했어. 그 힘으로 얼른 저녁을 차려먹고 산책을 나섰는지도 몰라.

방금까지 본 사진은 그녀 덕분에 움직일 힘을 얻어서 걸었던 나의 산책길이야. 흔들리고 기울어진 사진들을 빼고 꽤 점잖은 사진들을 골라둔 거야. 예쁜 걸 얼른 담고 싶은 마음과 한번 찍고 한번 더 고심해서 버튼을 사진 중에 너는 어떤 게 좋아? 나는 둘 다 좋아서 나 혼자서는 둘 다 볼 테지만, 시간을 들여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너에게는 좀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으니까 고르고 골라서 이 사진들을 꺼내 쓸게.


내가 나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시간이 있잖아. 세상에 내가 가장 큰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잖아. 타인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 때. 그때 그 사람의 손길이 나랑 세상을 다시 이어줬어. 연결감이란 건 사소한 이런 순간이 아닐까? 내가 이 버스 안, 이 자리에. 나 혼자가 아니라 각자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그리고 나랑 너는 마음만 먹으면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겠지. 열린 가방을 닫아줄 수도 있겠다. 그래, 그런 세상 속의 나를 인지하고 나만의 세계에서 수욱- 빠져나오기도 한순간이었어. 집을 가는 길이 조금 더 생생해. 츄리닝을 입고 검은 패딩을 걸친 사람, 두 명의 뒷모습, 언덕을 올라오는 다섯, 여섯 명의 사람들. 불 켜진 운동장, 야구하는 사람들. 조명이 비추는 건물 위 사이사이 끼어있는 그림자. 그런 것들이 생각나. 좀 더 살아있는 느낌이야.


눈을 건네고 손을 잡아야지. 이 이어져있다는 마음을 너에게도 찡-하고 전달하고 싶다. 내가 만들고 싶다.


이런 뭉근한 마음들 사이에서 너무너무 기쁘게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 사진도 잘 찍히는 날 같아서, 매번 지나치기만 했던 차를 오늘은 찍고 싶은 거야. 맨날 서 있고 맨날 멋지지만, 찍을 마음이 없던 나한테 찍고 싶은 날이었던 거지. 한 장 찍고 난 뒤에 구도를 다시 맞추고 찍어보려는데, 차가 지나가고 차가 지나가는 걸 기다리니까 환경미화 트럭이 골목을 올라오더라. 지나가시면 다시 찍어야지 하고 비켜섰는데 내가 애매하게 서있었나 봐. 골목길을 올라오시는 아주머니께서 아이코, 하시면서 손짓을, 얼른 비키라고 손짓을 하셨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해야지, 하는 눈빛으로.


 앞서 이미 감동을 받은 하루라서 내가 크게 받아들인 걸까?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거리에서 날 챙긴 거니까. 에너지를 쓴 거잖아. 내 일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다칠까 봐 뻗는 손짓. 이 두 명의 다정함에 오늘 내 밤은 유독 기억하고 싶은 찰나가 많아. 채워졌어. 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한결 편안하게 잘 잘 수 있었어. 우연히 받은 마음을 나도 건네고 싶어. 눈빛도 마음도 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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