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팝을 숨어서 듣던 시절이 있었다
짝사랑 후유증을 극복한 뒤에도 제이팝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오래도록 식지 않았다. 등하굣길 필수품으로 들고 다녔던 MP3 플레이어에는 어느새 일본어로 된 음악들이 플레이리스트를 빼곡하게 채웠다. 학교에 있을 때도 일본어 가사를 무심코 흥얼거리거나, 이상하게 여겨질 걸 몰라서 이런 노래가 좋다고 친구들한테 자랑을 하기도 했다. 그때 또래 친구들한테서 돌아온 질문은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너 오타쿠야?”
“그런 거 좀.. 이상한 사람들이 듣는 노래 아니야?”
“우리나라 노래도 있는데 일본 노래 왜 들어?”
요즘이야 일본의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내한 공연도 많이 오고, 일본의 팝 음악이 대중적으로 친숙하게 여겨지는 시대지만, 내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2010년대 초중반 때만 해도 일본 음악을 포함한 일본의 문화와 콘텐츠를 낯설고 이상하게, 심지어 유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여성의 신체가 과장되게 그려지거나 노출이 많은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특유의 오글거리는 말투나 목소리가 연상되기 쉬웠기 때문에 일본의 노래도 죄다 그런 식으로 이상할 거라고 넘겨짚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에서 비롯된 반일 감정도 일본과 관련된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 한몫 했을 것이다.
그 시기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시선에 대한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나는 그저 노래가 좋아서 좋다고 한 것뿐인데, 내가 일본 정부가 저지른 만행까지 찬성하는 것도 아닌데, 그걸로 ‘이상한 애’뿐만 아니라 ‘매국노’로까지 나를 몰아가는 게 너무 싫고 무서웠다. 더 싫었던 건 (그런 ‘이상한’ 노래가 없다고는 말 못하지만) 일본의 음악을 한 곡이라도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이상한 노래로만 낙인을 찍던 그들의 말과 행동들이었다. 내가 이해받지 못하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힘과 위로를 주었던 음악들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너무 속상했다. 무엇보다 나는 가사 내용이 유해하거나 귀에 심하게 자극적인 노래를 추천한 적이 절대로 없다. 정말이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위 ‘제이팝 붐’이 오기 전까지는, 한동안 일본 음악을 혼자서만 몰래 들었다. 문명특급이라는 유튜브 방송 콘텐츠에서 유행시킨 ‘숨.듣.명.(숨어서 듣는 명곡)’이라는 말이 있다. 보통 ‘남들에게 추천하기 민망하지만 숨어서라도 자꾸 듣게 되는 노래’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나는 방구석에서 혼자 이어폰을 꽂고 정말 ‘숨어서’ 들었다. 어차피 좋은 말도 못 듣고 창피만 당하니 나 혼자 듣는 게 낫겠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좋음을 함께 공감하고 나눌 사람들이 주위에 없어서 외롭고 답답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온라인에서 접한 익명의 사람들의 존재가 더욱 소중했다. 특히나 기꺼이 노래 가사나 아티스트의 인터뷰를 번역해서 블로그나 유튜브에 올려주셨던 분들은 일본어가 짧았던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존재들이었다. 그 분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거나 교류한 적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동질감을 느꼈다. 나와 같은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저 분들도 나처럼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혼자 음악을 듣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정말로 그랬을지는 알 수 없지만, 오해였다면 죄송하지만, 이제라도 익명의 그분들에게 늦은 감사를 전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이 제이팝 팬으로서 너무 감개무량하다. ‘일본’의 ‘ㅇ’만 말해도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던 시기를 거쳐 왔기 때문에 그런 시대가 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일본의 대중 음악이 음지의 무언가, 이상한 무언가가 아닌 ‘음악’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 더 나아가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일본의 대중 음악을 느끼고, 이해하고, 좋아하고, 추천하는 시대. 일본의 음악이 우리나라 음원 차트에서도 상위권을 찍고, 유튜브와 SNS에서 유행의 흐름이 되는 시대. 나의 취향을 더 이상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도 되는 시대. 그 시대를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른다. 어느새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물론 선입견은 여전히 존재한다. 옛날보다는 바라보는 시선이 나아졌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제이팝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특이하게 생각하거나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국내의 케이팝이나 인디 음악, 영미권 팝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면 과연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라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취향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사람들한테는 일본 음악도 결국은 해외 팝 음악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처럼, 다른 국가들처럼, 일본에서도 다양한 장르와 분위기의 음악들이 존재하고,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꼭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런 결실들을 조금이라도 자세히 들여다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 마음에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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