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나비효과, J-POP 입문기
J-POP(이하 제이팝)을 처음으로 접한 시기는 이제 막 중학교 2학년의 신학기가 시작될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귀엽고 우습기만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짝사랑했던 선생님의 전근이라는 실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왜, 흔히 ‘중2병’이라고 부르지 않나. 자아가 비대하다 못해 사소한 시련과 고통까지도 거대하게 느껴지는 시기. 감성이 충만하다 못해 넘쳐흐르던 슬픔과 허전함을 주체하지 못했던 나는 실연의 자아를 위탁하고 나에게 공감과 위로를 제공해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다. (짝)사랑을 주제로 한 인터넷 소설, 영화, 드라마, 그리고 음악을 닥치는 대로 소비하며 일찍이 끝나버린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그 분에 대한 그리움을 곱씹었다.
하지만 항상 뭔가가 부족했다. 그 당시 내가 듣고 접했던 사랑 노래들은 대부분 떠나간 사람을 원망하는 이별 노래이거나 고백이나 데이트 전 설레고 행복한 마음이 가득한 사랑 노래였다. 물론 모든 노래가 꼭 나를 위해서 존재할 필요는 없다지만, ‘슬픔의 강도가 너무 세지 않고 상대에 대한 적절한 선을 지키면서도 진솔한 마음을 담을 것’이라는 나름의 까다로운 기준을 만족시키는 노래는 정말 찾기 힘들었다. 첫사랑에 대한 나의 상실감과 아쉬움을 채워줄 만한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싶지만 그때는 그것이 한동안 나의 가장 중요한 하루 일과였다.
그러다 제이팝을 만났다. 일본어로 된 사랑 노래를.
처음 듣게 된 노래는 윤하의 ‘好きなんだ (스키난다 / 좋아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등의 검색어로 음악을 찾다가 걸려든 곡일 것이다. 그땐 일본어라곤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어서 그저 꼬부랑 글자와 한자만 식별할 수 있었던 수준이었지만, 한국어 번역이 되어 있어서 가사를 읽어봤던 것 같다. (만약 한국어 번역을 찾을 수 없었다면 난 그 노래를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これまで 過ごした 日日を振り返って
코레마데 스고시타 히비오후리카엣테
지금까지 보내온 날들을 돌아보면
ただただ ありがとう
타다타다 아리가토
그냥 그냥 고마워
가사를 슥슥 넘기며 보다가 이 부근에서 스크롤이 멈췄다. 그 선생님한테 관심 받고 싶어서 좋아하지도 않았던 물리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고, 하나라도 질문 거리를 찾아서 교무실에 출석했던 소소한 설렘과 기쁨들, 인사를 잘한다고, 대답을 잘한다고 칭찬해주시던 선생님의 웃던 모습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거구나. 덕분에 학교 생활이 조금이라도 행복했고 즐거웠으니까. 하루하루가 그만큼 특별했으니까. 그 말을 조금이라도 더 전하지 못했던 게 못내 아쉬웠고 슬펐던 거로구나. 그 생각에 어쩌면 그동안 마음 한 켠에 쌓여 있었을 눈물이 흘러내렸다. 외계어처럼 들렸지만 그때까지 들었던 그 어떤 노래보다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철부지 같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짝사랑 노래도 아니었지만.
한동안 그 노래만 듣고 또 들었다. 일본어는 하나도 몰랐지만, 대신 한국어 독음을 몇 번이고 소리내어 말하고, 외우면서 다녔다. 노래방 기계에 등록되어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진심을 다해 잘 부르려고 틈이 나는 대로 열심히 연습했다. 처음엔 따라가기도 벅차서 부를 곳을 놓치거나 엉뚱한 곳을 부르기도 했지만, 귀에 익으니 멜로디와 가사에 맞춰 부르기도 수월해졌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나중에는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워서 일본어로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까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 적이 없진 않지만, 그것 따윈 상관없었다.
한편으론 일본의 노래 자체에도 점차 호기심과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상하고 생소하게만 느껴졌던 일본어 발음이었지만, 물 흐르듯 지나가거나 동글동글하게 들리는 것이 한국어의 각진 느낌하고는 많이 달라서 귀엽기도 했다. 또한 가사에서도 상대적으로 개인의 감정에 더 솔직하고 섬세한 표현이 마치 시를 읽는 것 같기도 해서 감수성이 풍부했던 나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당시 국내 노래나 해외 팝도 많이 들었지만, 내 마음을 충분히 얘기해준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드디어 나의 일기장으로 삼을 노래들을 찾아낸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번역과 복사에 의존해가며 유튜브와 네이버 블로그에서 일본어 노래를 다양하게 많이 찾아 들었다. 음악 취향은 약 13-14세 때 들었던 음악으로 결정된다던데. 그래서 아직도 일본어만 보면 눈이 반짝거리고, 플레이리스트도 J-POP으로 그렇게 꽉 차있나 보다. 그때는 내가 그런 어른이 될 지 몰랐겠지만.
그렇게 어쩌다 제이팝 세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はじめまして(하지메마시떼 /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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