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네 ep.9) 결혼기념일에는 꽃다발보다 파다발

감동의 포인트는 모두 다르다.

by 릴라랄라

낭만은 나에게 늘 낭비였다.

쓸모와 이익을 따지지 않고 시간과 마음을 기꺼이 흘려보내는 일,
그것은 늘 조마조마해하며 쫓기듯 살아온 나에게는 너무 낯선 여유였다.


토리씨(남편)를 만나고 나는 조금씩 인생의 여유와 낭만을 배워간다.
쫓아오는 이 하나 없는데도 끊임없이 쫓기듯 살아가는 나를,
토리씨는 늘 토닥여준다.




나는 낭만이 부족한 편이다.
낭만보다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선호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보통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주고받는 선물들이
나에게는 크게 매력이 없다.


예를 들면 꽃다발, 인형, 분위기 좋은 비싼 레스토랑 같은 것들이다.

그중 꽃다발과 인형은 심지어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연애 때부터 토리 씨에게 단단히 못을 박았다.
“나 꽃이랑 인형 싫어해! 그런 건 절대 사주지 마.”


“꽃다발은 먹지도 못하고, 일주일이면 다 시들고…
버리자니 아까워서 말리면 부스러지고, 버리기도 번거로워.
그리고 인형은 먼지 쌓여서 싫어. 집먼지 진드기의 집이야!”


그러면서 농담처럼 이런 말도 했다.
“나 꽃다발 줄 거면 대파다발 줘. 먹기라도 하게.”


지금 생각해도 낭만이 코딱지만큼도 없는 여자친구였다.
이런 나와 연애를 했던 토리씨도 나름의 고충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낭만이 부족했지만,
토리씨는 낭만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꼭
잊지 못할 우리만의 낭만을 선물해 주었다.


토리씨를 만난 순간부터,
낭만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던 나에게
낭만은 곧, 토리씨였다.
우린 서로 사랑했고,

연인에서 부부가 되었으며
지금은 부모가 되어 다섯 살 딸아이를 키우고 있다.


올해는 우리의 결혼 8주년이다.
우리도 결혼기념일을 챙긴다.
선물이나 꽃다발을 주고받지는 않지만,
평소 먹는 음식보다는 조금 더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으러 간다.


이번에는 기념일 전 주말에 미리 저녁을 먹었다.
그래도 당일을 그냥 다른 날처럼 넘기기 아쉬워
작은 케이크를 사서 아이와 함께 축하하기로 했다.


그날 우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

손을 잡고 예쁜 케이크를 사 왔다.
그리고 하원시간에 맞춰 로라를 데리러 유치원에 갔다.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과자와 식재료를 샀고,
마침 떨어진 파도 한 단 담아왔다.


집에 도착해서 나는 로라를 챙기고 토리씨는 장본 것들을 정리했다. 토리씨는 다른 식재료들은 냉장고에 정리하고, 파만 싱크대 위에 꺼내놓으며 말했다.


“오늘 이건 내가 다듬을게. 결혼기념일이잖아.”


나에게는 이 대사가 바로 로맨스이자 멜로였다.
내 남자지만 참 멋졌다.
토리씨는 나를 감동시키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는 집안일을 나눠 하지만 내가 특히 감동하는 순간들이 있다.

파를 다듬어 냉동실에 넣어줄 때

수박을 먹기 좋게 잘라 통에 담아줄 때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줄 때


내가 꺼려하는 일을 토리씨가 척척 해낼 때,
그 순간 ‘저런 것도 해줄 만큼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심장에서 하트모양 비눗방울이 퐁퐁 솟아오른다.


알록달록 예쁜 꽃다발보다
냉동실 지퍼백 가득 든든하게 채워진 파 한 봉지가
나에게는 훨씬 더 큰 감동이다.


냉동실을 열 때마다

지퍼백 가득 채워진 파를 볼 때마다

마음이 든든해지고 토리씨의 사랑이 느껴진다.

결혼기념일이 일주일 넘게 지난 지금도

냉동실의 파는 여전히 든든하게 남아 있다.


역시 나에게는,


꽃다발보다는 파다발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 토리씨의 넘치는 인간미!

결혼기념일 다음 날, 요리를 하려고 냉동실을 열었다.
가득 담긴 파가 지퍼백 안에서 투톤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대파의 흰 부분은 바닥에 깔려 있고, 초록 잎은 그 위에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이렇게 얼려놓으면 파를 고루 쓰기가 어렵다.

‘정말, 이 사람 나 없이는 안 돼.’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파들은 섞이지 않고 저렇게 나뉘어 담겨 있는 것일까?

얼어붙은 파를 식탁에 쿵쿵 내리쳐 흩트리고, 고루 섞어 두 봉지로 나눠 다시 담았다.


나는 토리씨의 서툰 모습까지도 좋다.

완벽하지 않아도 애써주는 그 마음이 참 좋다.
토리씨가 남편이라서, 정말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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