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가는 거였는데
일단 이건 짧디 짧은 나의 30년 역사에 절대 일어나지 않았던 최초의 일이다. 나는 여행에 대해 광신도적으로 집착증이 심한 터라 내 손으로 선택하고 결제를 마친 티켓에 대해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기에 더욱더 취소란 건 있을 수 없다고 믿고 “떠남”을 실천해왔다.
첫 직장에서는 연차를 땡겨쓰면서까지 틈만 나면 휴가를 쓰고, 여행을 다녔었다. 눈치는 잠깐이고 여행은 영원하니까.
그리고 2016년, 6월 말에 두 번째 회사로 이직했지만 3개월도 안돼서 쿨하게 5일 연차를 질렀다. 여기 정말 내가 퇴사할 때까지, 실장님도 팀장님도 연차 하루 이상 절대 안 쓰는 조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9월부터 10월로 이어지는 황금연휴를 그냥 놓아줄 순 없었다. 암튼 연휴까지 10일 정도 만들어서 암스테르담과 더블린을 다녀온 여자, 나야 나 나야 나.
연차는 5일이 기본 아닌가요?
그 후로도 나의 연차는 늘 자유로웠다. 연차계의 잔다르크를 꿈꾸며 상위자가 휴가를 가던 말던, 내 연차 내가 쓴다는데 오래 쓴다고 생트집을 잡으며 지랄을 하든 말든, 그런 건 내가 그런 눈치 안 받으면 그만인 거니까, 그냥 쓰고 싶을 때 당당히 썼다. ( 물론 내 휴가로 인해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상황에서만 ) 암튼 나는 연차 쓰는 걸로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 동료들에게 기나긴 휴가 계획을 말하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너네 진짜 아직도 모르겠어? 잠깐의 눈치? 불편함? 이딴 쓰레기 감정은 이 회사랑 당장 내일이라도 작별하면 그만인 거고 여행은 영원해!”
그런데 그로부터 약 4년이 지난 2019년 8월, 동유럽 여행을 딱 한 달 앞둔 오늘날의 나는, 올해 초부터 예약해둔 9월의 동유럽행 티켓을 취소하고 있었다. 이런 행동은 지금 속한 이 회사를 퇴사함과 동시에 밀려올 후회 중에 최고로 손꼽힐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입사 두 달 차, 벌써 세 번째 회사지만, 나는 지금 일종의 며느라기를 겪고 있는 거 같다. 누구도 눈치를 주지는 않지만 혼자서 발을 구르며 눈치를 보는 상황. 다시 새롭게 소속된 이 집단에 어떻게든 맞춤형 인간이 되어보고자 하는 노력. 두 번째 이직인데 언제나 적응에는 로딩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생활에 대해 아는 게 많아질수록, 업무 외적으로도 어떻게 하면 새로운 집단에서 더 빠르게 적응해낼 수 있는지 알아갈수록, 아니... 내가 한국 사회의 꼰대 문화를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닮아갈수록,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연차 쓰는 걸 눈치 보는 동료들에게 침을 튀겨 가며 목소릴 높이는 쪽이었다. 연차는 우리에게 부여된 신성한 권리이자 월급과도 같은 평화이니 눈치를 볼 것도, 봐서도 안된다고. 그저 우리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고, 쓰고 싶으면 쓰는 거라고, 진짜 미친 듯이 연차 사용을 독려했었다.
그러던 내가, 어쩌면, 지나온 두 개의 회사보다 더 합리적인 선택적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는 이 조직에서, 이직하자마자 아무런 퍼포먼스도 없이 연차를 5일씩이나 쓰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며, 스스로 내적 갈등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여행 취소”라는 결정이 나 스스로도 너무 당황스럽고 놀라워서 인정하기 싫었는데, 한편으론 취소하자마자 마음이 너무 편해져서 더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다.
사실, 이직을 하고 첫 출근 때부터 나의 그 긴 여행과 연차 계획에 대해 언제쯤 털어놔야 할지 여간 마음이 쓰였던 게 아니다. 이 타이밍이 좋을까? 지금 말할까? 와 시발 언제 말하지? 근데 오자마자 진짜 별로인 거 같아, 입사 전에 이미 방콕도 다녀왔는데, 라는 생각으로 반나절을 보낸 적도 있다.
초록창과 블라인드에 이직 휴가, 휴가 이직, 이직하고 휴가, 이딴 키워드 검색해가며 퇴근한 날도 있고, 주변에 온갖 친구들 소환해서 “나 저번에 예약해둔 동유럽 10일, 당연히 가긴 갈 건데, 진짜 존나 걱정됨. 그래도 난 갈 거라는 거 알지?” 라며 동의를 구해보기도 했다.
근데 남편은 이건 아주 쉬운 문제라고 했다. 넌 직관적인 사람이니 마음이 불편하고, 5일 연차를 입밖에 꺼내기 좀 짜증 나면 이번 여행은 미뤄도 된다고, 너의 연차는 여전하고, 마침 딱 한 달 전이라 취소 수수료도 없고, 금액은 반환될 거라 아무 문제가 없으며, 이번 동유럽은 인연이 아니었다 생각하고 차선책으로 블라디보스톡 킹크랩 축제나 우리가 좋아하는 따뜻한 나라에 가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새롭게 소속된 회사에서 잘하고 싶은 마음,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을 선택했으면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일 뿐이라고. 가끔 치명적 도움이 되는 오빠 덕에 귀 얇은 나는 금방 평화를 되찾기도 한다.
아무튼 나의 욜로 라이프는 이렇게 마감되는 것 같지만 적어도 골로 가지는 않을 거 같다고 나 스스로를 위로하며, 지옥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는 매주 수요일의 출근길도 익숙해지는 걸 보니, 나란 미생늬연, 돈 맛을 아주 제대로 봤구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