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당의 추억
연애 초, 나는 내키는대로 말 하고 행동했다. 내 기분이 중요했고 만나기 싫으면 안만나야지 하는 마음 뿐. 나는 다칠일이 없어야한다는 철저한 자기위주로 상대방을 대했다. 그에비해 그는 영화 늑대소년의 송중기마냥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집중했다. 너무 빨리 다가오는것 같으면 '기다려'를 외쳤고 그는 낑낑거리며 기다렸다. 평생 한 마리의 암컷만을 사랑하는 늑대처럼 그는 내게 직진했다.
'내가 나쁘고 못되지 않아?' 라는 물음에 그는 '적당히 나빠야할 때 나빠서 좋다.' 라며 자기 취향을 기준삼아 답했다. 약속에 30분 늦으면서 해맑게 웃고 있기. 그가 집에 가려면 내려야할 정류장이 지나치도록 내가 갑자기 다정하게 이야기를 끌어가 기어이 데려다주게 만들어놓고 한다는 말이 '우리집 멀어서 힘드니까 굳이 안데려다줘도 되는데'라고 하기, 전철에서 앉은 나와 마주본 상태에서 내 옆자리가 빈 경우가 아닐 경우에는 빈 자리가 나도 계속 내 앞에 버텨 서 주지 않으면 큰일날거라는 눈 부릅뜨기 등이 그의 기준에선 나의 적당한 나쁨이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하수였다. 나의 나쁨이 용서될 수록 그래도 괜찮아 하고 쓸쓸히 웃는 그의 애잔함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갔다. 그때는 노는 것이 너무 좋으 언제나 주말에 약속 잡기 바빴던 때여서 오전에 만나 데이트를 점심먹는것 까지 하고 친구들과 오후부터 만나기 위해 번화가로 데이트장소를 잡았고 그에게는 '주말엔 쉬어야지'하고 정확한 시간에 돌려보낼 때도 그랬다. 악의는 없었다. 나는 그저 많은 사람들과 동호회 활동도 하고 생일 파티에 가거나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처럼 노는 것에 환장했기 때문이었다. 정숙하고 다정한 그의 분위기는 나의 취향이었지만 그것이 빛이라면 술 진탕 마시고 웃고 떠들며 사람들과 놀고 떠들고픈 욕구는 짙은 그림자였다.
그래서 나는 쉬면서 그와 만나다가 일을 다시 하게 되었을 때 꿀잠을 포기하고 주말마다 부지런히 아침부터 빛과 그림자를 오가기 위해 체력을 불살라야 했다. 그래서인지 카페에서 그와 나란히 만나면 어깨에서 20분은 급 잠에 떨어져서 그는 그동안 책을 읽거나 핸드폰 게임을 해야했다. 깨고나면 또 둘이 폭풍수다를 떨었다. 오죽하면 백일무렵엔 둘다 후두염에 걸렸을까.
나는 엉뚱할지도 모르지만 이 빛과 그림자의 균형을 유지하고 싶었다. 연애를 한 만큼 친구에게 신경을 쓰고, 데이트를 한 만큼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냥 내가 그런면에서 개차반인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약속을 위해 자꾸 출발해야 할 시간보다 30분 ~ 한 시간 늘어지더니 어느날 그가 말 했다. '나는 쪽데이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식구들도 데이트하러 나간 내가 일찍 집에 들어오면 놀래.' 라고 힘줘 말했고, 나는 미안한 마음을 안고 친구를 향해 가는 버스를 잡아탔다.
처음으로 내게 불만을 표한 그를 존중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날은 늦은 오후에 있는 동호회 정모시간이 지나도록 데이트를 하다가 그냥 정모를 펑크 내 버렸다. 그는 가야하지 않겠냐고 눈이 휘동그래져서 거듭 물었고 나는 그저, '오늘은 별로 모임이 안땡겨서' 라고 말 했다. 그가 내 손이나 어깨를 잡는 힘이 강해진 것 보니 그날의 하루종일 데이트가 퍽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렇게 빛의 지분을 늘려갔고 나의 술 약속이나 늦은 모임들은 점점 잦아들었다. 주량이 센 편은 아니지만 술자리를 즐기는 편이었다. 확실히 술자리를 줄이니 체력이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와 밤샘 통화는 언제나 나의 '졸려'멘트로 끝나거나 잠에 떨어져버리는 것으로 끝나곤 했는데 정상적인 '잘자, 내 꿈꿔'멘트가 가능해졌달까.
여하튼 어둡지만 다채로운 그라피티 낙서가 가득하고 철거직전인 건물들에 빨랫줄이 주렁주렁 걸린 할렘이 나의 애인없이도 즐거웠던 모임과 시간이었다면, 그는 악의없지만 망설임없는 근면한으로 꾸준히 서명을 받아내서 그 지역일대를 재개발 하고 가로등을 꼼꼼히 심어 그의 빛의 영토를 내 시간에서 넓히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이 골목은 오랜 맛집이 있고 문화가 있으니 남겨두자'라는 식으로 내가 모임을 완전히 안나가게 되고 시무룩해 할까봐 여유롭게 남겨두는 액션까지 취했다.
그와 만남을 지속한지도 수년이 흐르고 있다. 잘 지내고 있지만 어쩐지 그가 내 삶을 공원으로 바꿔가는 듯 해서 가끔씩 뒷골목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이미 그는 내가 무사히 어딜 갔다올지 이미 알고 있고, 나의 상냥함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빴던 시절의 내가 너무나 그립다. 오로지 내 뽀뽀와 다정함을 받기 위해서 시베리아 벌판 위에서도 꿋꿋하게 내게 달려올 준비가 된 한 마리의 배고픈 늑대소년이던 그가 너무 그립다. 오늘은 그에게 앙탈을 부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