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퇴의 굴레에서 벗어나다
"얼른 눈 감아!"
"이제 자야 할 시간이야!"
"늑대 아저씨 온다!"
"도깨비 아저씨 전화할까?"
"이제 조용! 자자!"
갖은 협박이 난무하는 지금은 바로 육퇴를 앞둔 아이들의 잠자리 시간. 놀이터에서 그렇게 놀고, 따뜻한 물에 목욕도 했는데. 도통 잘 생각이 없다. 나를 기다리는 신랑도, 시원하던 맥주도, 따끈한 치킨도 그렇게 하염없이 식어간다.
"아직 안 자?"
신랑의 카톡이 온다.
"응, 먼저 먹어."
"아냐, 기다릴게."
동지애를 발휘하는 육아 동지의 마음이 고맙다.
그런데 뭔가 조용하다. '잠들었나?' 슬며시 돌아보니, 역시 아직 잠들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잠은 눈곱만큼도 안 오는데 자는 척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역시나 잠이 오지 않는데 자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퇴근 5분 전 일거리를 던져주는 상사처럼 야속하기도 하다.
그렇게 혼자 속으로 부글거리는데 이번엔 진짜 조용하다. 쎄근쎄근 천사의 숨소리가 들린다.
잠들었다!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온다.
드디어!
육퇴!
아, 이때의 짜릿함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기분과 맞먹는다. 그 시간이 짧아질수록 우리의 환호는 더 커진다. 들어가서 10분도 안 되어 나올 때는 문 밖으로 나온 자와 문 밖에서 기다린 자 둘 다 함박웃음을 짓는다. '벌써 자?'라는 물음에 의기양양해진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주 가끔 있기에 그렇게도 기쁜 일이겠지.
드디어 신랑과 마주 앉아 조금 식은 치킨에 시원한 맥주를 마신다. 좀 식어도 치킨은 너무나 맛있다. 도란도란 오늘 있었던 일, 누구네 집 이야기, TV 이야기 등 일상의 이야기를 나눈다. 어영부영 12시가 다 되어서야 마무리를 짓고 우리도 잠자리에 든다. 내일을 위해 아쉽지만 자야지.
신랑의 알람이 요란하게 울린다. 누운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알람이라니! 새벽 출근을 하는지라 아직 아이들이 잠들어있다. 얼른 신랑을 흔들어 깨운다. 아이들이 깨는 건 정말 원치 않는다. 하지만 신랑도 만만치 않다. 첫 번째 알람이 울리고 두 번의 알람이 더 울려야 겨우 일어난다. 나는 알람이 울릴 때마다 깨어 아이들이 깰까 노심초사다. 한 때는 함께 일어나 먹을 것도 챙겨주고 인사도 해주고 했지만 이젠 체력이 안 된다. 조금만 지나면 아이 둘이 일어날 거고 그러면 또 등원 준비를 해야 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두 번의 출산과 나이 탓을 하며 잠을 더 청한다. 그리고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지 않는가?!
이젠 나의 알람이 울린다. 겨우 눈을 뜨고 멍하니 천정을 보다가 시간이 임박해서야 아이들을 깨운다.
"더 자고 싶어~"
"늦게 자니깐 그렇지! 오늘은 일찍 자!"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꼭 나에게 하는 말 같다.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제의 피로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지만 얼른 보내고 좀 쉬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두 아이의 등원을 준비한다. 아침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함께 나선다. 꾸물거리는 아이에게 빨리 가자고 다그친다.
그러고 보면 매일 밤과 매일 아침은 늘 전쟁이다. 하지만 그 전쟁의 끝에는 큰 포상이 있다. 육퇴 후 맥주 한잔과 등원 후 휴식 시간. 정말 꿀 같은 시간이다.
아이 둘을 다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털썩 앉는다. 어제 신랑이랑 이야기한다고 못 본 카톡이 너무 쌓여있다. 단톡방의 벽을 타며 혼자 큭큭 웃기도 하고, 어제까지 였던 핫딜에 참여하지 못해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단톡 속으로 들어간다. 뭐 별로 한 말도 없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정신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사야 할 것들을 쇼핑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쥔다. SNS에 들어가 좋아요도 누르고 나는 못 해도 남은 하는 깔끔한 주방과 거실을 대신 보며 눈으로 만족한다. 공구를 발견하면 당장 필요하진 않지만 필요할 것 같은 그것을 사고, 등원하는 아이의 모습을 나의 SNS에 올리며 나도 엄마임을 증명한다.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나는 몰랐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즐겁지 아니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시간을 함부로 쓰고 있었다.
육퇴 후 나는 내일의 나를 끌고 와 앉혀놓고 육퇴를 즐겼고, 아침이면 오후의 나를 끌고 와 하루를 보냈다. 카드깡도 아니고 미래의 나를 끌고 와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그 결과는 피로에 피로로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눈을 떴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고 새벽을 여는 유튜브 라이브를 보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참여한 라이브 채팅을 보며 놀랐다. 내가 겪어보지 않아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이 거기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새벽에 뭘 하는 거지?'
그 신기한 세상이 궁금해 며칠을 새벽에 일어났다. 며칠 일어나다 보니 육퇴보다는 잠이 더 달콤해졌다.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간 내가 일어나지 못 하자 급기야 신랑이 깨우러 들어왔다.
"안 일어나?"
"응, 잠이 너무와 그냥 자야겠어."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렇게 서서히 육퇴 없는 이른 잠과 새벽 기상이 시작되었다.
안녕, 나의 달콤한 육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