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누구였더라?
"언젠가 너도 못 알아볼지도 몰라."
놀이터였다. 아이는 한참 놀고 있었고, 누군가가 다가와 나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봤으나 누구인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어~~ 잘 지냈어?"
얼굴은 살짝 기억이 나는 듯 하니 나 또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잠시 잠깐 나를 얼음으로 만들었다.
"야, 내 니 선배거든?!"
아뿔싸. 그 말을 듣는 순간 뇌는 아주 빠르게 얼굴과 이름을 매치시켰고, 관련된 기억들을 소환했다.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았고, 다시 정정하여 인사를 나누었다. 사실 그 선배와의 끈끈한 기억 같은 건 없다. 그저 마주치면 인사했던, 입학했을 때 한학번 선배였기에 인솔을 받은 기억이 다였다. 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그 일은 나에게 꽤나 충격이었다. 비슷한 일이 고등학교 때도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다른 학교 축제에 놀러 간 날이었다. 구경을 끝내고 친구와 즐겁게 가고 있는데, 누군가 뛰어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아주 반갑게. 그런데 누구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17살의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역시나 반갑게 인사를 했고 그렇게 지나쳤다.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누구야?"
"글쎄, 전혀 기억이 안 나."
"전혀?"
"응, 전혀."
그리고 지금까지도 누구인지 모른 채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친구도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난다. 그저 그 일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
두 번의 기억 단절을 겪고 나서 나름 심각해졌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상대는 나를 단박에 기억을 하는데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다니. 그러고 보니 사람의 이름도 곧잘 잊곤 했다. 입가에 맴도는 것이 아닌, 전혀 기억나지 않는 백지상태를 마주했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겪어본 사람만 알 것이다.
그 후로 기억을 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우스갯소리로 친한 지인에게 기억 단절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언젠가 너도 못 알아볼지도 몰라."
라며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마냥 말했고, 나에게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억 연상법 등을 검색해서 익혔다.
그러다 문득, 내 기억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것을 보는 것은 눈이 달라서가 아니라 선택이 다른 것이다.
"방금 저 여자 봤어?"
"누구?"
"노란색 모자 쓴 여자."
"못 봤는데?"
못 본 게 아니고 안 본 것 아닐까. 시각적으로는 들어왔지만 선택받지 못한 것이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선택받지 못한 기록이기에 기억으로 떠올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난 그저 그 기록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 기록은 나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분류된 것이다.
나는 이제 "언젠가 너도 못 알아볼지도 몰라."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나에게 소중한 것들은 한번 더 곱씹으며 기억 속에 저장한다. 그리고 괜찮다. 조금 잊어도. 그 자리에 소중한 다른 것들이 메우게 될 것을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