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참 억울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영화처럼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러닝타임 내에 이야기가 종결되는 구조가 아닌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1년 가까이 시간을 두고, 조금씩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감독과 배우, 제작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손을 떠난 ‘관객’의 몫으로 판단되는 반면 드라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경을 안 쓸 수도 있지만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시청률과 시청자의 반응은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아닐까 합니다.
드라마 [인간실격]은 첫 방송 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2021년 버전이다 라는 말로 시쳇말로 유명세를 치렀습니다. 게다가 주연 배우가 전도연과 류준열이라니 더욱더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지요. 첫 방송 이후 다양한 반응들이 나왔고, 언제나 그렇듯이 호불호가 갈린 댓글들이 인터넷에 차고 넘쳤습니다. 마치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첫 방송을 했을 때와 같았습니다. 그때도 주연배우인 이선균과 아이유의 캐스팅, 연기력 등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지만 극이 전개되면서 ‘인생 드라마 탄생’ ‘아이유의 반전 매력, 지안은 아이유밖에 못해 ’ 등으로 이야기의 판도는 달라졌지요. 그리고 방영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다양한 OTT 플랫폼에서 명품 드라마, 인생 드라마 베스트 10 자리를 놓치지 않는 드라마가 되고 있습니다.
16부작으로 예정된 드라마 [인간실격]는 이제 막바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은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드라마 [인간실격]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평범한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단, 여기에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지요. 잘 다치고, 많이 슬퍼하는 그리고 내면의 상실과 아픔을 안고 사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안 아픈 사람, 안 힘든 사람이 없는 것이니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중 아프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홀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세상을 향해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40년을 살면서 ‘아무것도 되지 못한’ 여자 부정(전도연)과 고등학교 때 아버지를 잃고 철이 일찍 들어버린, 엄마보다 엄마의 슬픔을 더 이해하게 된 남자 강재(류준열), 강재의 친구이자 소심하고 내성적인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라는 말 한번 제대로 크게 못해본 너무 착한 딱이(윤수빈), 아내를 버렸다는, 후배의 남편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사는 순규(조은지)와 우남(양동근), 수다스럽고 억척스러운 엄마지만 길에서 박스를 줍고 있던 사돈, 부정의 아버지(박인환)를 외면하지 못하는 오지라퍼 민자(신신애)까지 어느 한 사람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드라마 [인간실격]은 계속 우리에게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아파야 할까요?”
“슬픔이 커지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라고 말입니다.
이 드라마에 대한 댓글을 읽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아픈 드라마’ 일 것 같아서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상처’와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하고 드러내는데 익숙하지 못합니다. 자칫 그런 감정을 드러냈다가 남들에게 ‘약점’이라도 잡힐 건만 같아 애써 감춥니다. 어쩌면 강재와 부정이 이토록 서로를 그냥 바라보는 것은 그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조차) 서로의 ‘아픔’을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안전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사람 강재(류준열)는 자신보다 더 슬퍼 보이는 사람 부정(전도연)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자신보다 더 슬픈 사람 부정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면서 그는 자신보다 더 슬픈 사람 앞에서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아주 천천히 “잘못 지은 건물처럼” 무너지고 (부정의 대사) 있다고 말하던 부정은 조금씩 강재를 통해 변화해나갑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욕심 없는 척,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싶었다고, 아버지에게도 남편에게도 자신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매일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저 역시 그런 ‘증명 시스템’에 놓여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그런 행위의 증거겠지요)
하지만 무엇이 되고 싶다는, 무엇을 보이겠다는 욕망보다는 우선은 나 자신의 상처를 잘 들여다보고 그 상처와 함께 숨 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어쩌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방영분에서 부정(전도연)은 이렇게 말합니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꼭 뭐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뭐라도 되고 싶었나 봐요. 뭐라도 되고 싶었는데, 그런데 그게 잘 안됐어요. 지금은 그냥 기다리고 싶어요. 사는 게 너무 창피해서 다 끝내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냥, 기다리고 싶어요. 다 지나갈 때까지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지금은 ‘조금 기다려야 할 때’가 아닐까요 올해가 70여 일 남았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올 한 해 뭘 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부터라도 거창한 무엇보다는 오늘 하루를 기록하고 메모하며 나를 먼저 돌보고 살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철학자 김진영 선생님의 책 <상처로 숨 쉬는 법>의 한 단락을 전해드립니다.
“저는 관리보다는 돌본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나를 잘 돌보기’입니다. 산다는 것은 기술입니다. ‘자기를 돌보는 기술’이고, 이 말은 ‘자기의 권리를 찾는다’라는 것이에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특히 청춘 세대들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면 한번 그 상처를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일들이 곧 나를 돌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