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9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읽는다. 대학교 1학년 때 문학개론 수업에 처음 이 책을 읽고 내가 얼마나 무모하게 국문과라는 곳을 왔는지 뼈저리게 느끼며 휴학을 할까, 편입을 할까를 얼마나 고민했던가.
내 인생에서 큰 선택을 하게 될 때는 항상 '최선'보다는 '차선의 선택'을 했던 것 같다. 전공을 선택할 때도, 내 인생의 가장 큰 진로를 선택할 때도 말이다. 내가 정작 반드시 꼭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 '차선의 선택'을 말이다.
당시에는 나는 왜 항상 '최선'이 아닌 '차선'만 선택해야 하는지 (물론 내가 최선의 것을 선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격조건을 가졌기 때문이지만) 하늘을 원망하고, 부모를 탓했다.
뛰어난 지능을 부여받지 못함과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빛이 나지 않는, 애매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나의 DNA를 말이다.
그리고 그 '차선'의 선택이 잘못된 선택임을 알게 된 날, 나는 아주 많이 울었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쨌거나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을 하루의 절반 이상 하고 있다. 누군가는 삶에서 어떤 일을 일상에서 절반 이상 하고 있다면 그게 '직업'이라고 표현했다.
돌이켜보면 항상 '최선'의 삶이 아닌 '차선의 삶'이었기에 좀 더 열심히 했던 것도 같다. 차선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어쩌다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근거 없는 기대감 때문에 말이다.
지금 현재의 삶이 '차선'의 삶이라고 너무 애달파하지 말자. 차선도 꾸준히 하다 보니 '최선'까지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것은 되어 있기도 하다.
글쓰기에 집중하기 힘든 시기다. 매일 쏟아지는 숫자, 답답한 현실, 게다가 이번 주부터 길거리에 쏟아지는 고성방가는 애써 집중하려는 나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나를 챙기고 나를 잃지 않는 방법으로 '문학'만 한 것이 또 있을까?
29년 전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1도 몰랐고, '무엇을 위한 글쓰기'라는 말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라는 챕터까지는 거의 읽지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20년 넘게 '차선책'으로 택했던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다는 모르지만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쓰기 어려운 시기에 하루 10분이라도 천천히 나의 생각을 메모하고 정리하다 보면 이 시기도 훌쩍 지날 테고 무엇보다 기록과 메모를 통해 내 생각을 잘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법 정도는 알게 되지 않을까 라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어본다.
어쩌면 그렇게 하다 보면 '차선'의 삶이 조금은 나은 삶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