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도전

친구를 위해, 나를 위해

by 더 로사 The ROSA

1편 이야기.

https://brunch.co.kr/@rosa1202/32


2편 이야기.

https://brunch.co.kr/@rosa1202/33


3편. 도전

-친구를 위해, 나를 위해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들판의 곡식들은 모두 수확되어 창고에 가득 쌓였고, 나무의 잎은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 바람 따라 흩날렸다.

시골쥐는 마당에 나앉아 볕을 쬐며 옥수수 낱알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만하면, 올겨울 걱정은 없겠네.”

작은 손으로 감자를 정리하던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순간, 마른 낙엽 사이에서 낯선 종이 한 장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발등에 툭 하고 떨어졌다.

종이엔 커다란 물 얼룩이 번져 있었고, 구겨진 모퉁이엔 조심스럽게 접힌 자국이 있었다.

시골쥐는 낯설지만 익숙한 필체를 보고 숨을 멈췄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치자, 그 안에는 급하게 휘갈겨 쓴 단 한 줄의 문장이 쓰여 있었다.


“도와줘!”


그 짧은 문장은 고요했던 시골쥐의 가슴을 세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서울쥐 특유의 힘 있는 글씨체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두 눈을 감는 순간, 서울에서의 기억이 밀려왔다.

반짝이던 샹들리에와 입에서 살살 녹을 것 같던 치즈케이크.

그리고 그 옆에 놓여 있던, 숨 막히던 공포.

귀가 찢길 듯한 고양이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소리 지르던 목소리,

쫓기듯 뛰고 또 뛰던 밤거리의 차가운 바람.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정말 그곳으로 가야 할까?’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걸어 돌아왔던 길이었다.

돌아왔을 때 여자친구의 팔 안에서 털을 비비며 한없이 떨었던 그날.

그 모든 게 마치 어제처럼 생생했다.


한참을 서 있던 시골쥐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편지를 손에 쥐고 집 안으로 들어가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작은 배낭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옥수수 몇 알과 곡식 자루를 챙기려다 다시 내려놓았다.

이번엔 곡식 대신 작은 수첩 하나, 나무로 된 숟가락 하나, 그리고 따뜻한 털옷 한 벌을 챙겼다.

그리고 서울쥐를 생각했다.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서 필요한 건 용기뿐이었다.


새벽 동이 트기 전, 시골쥐는 조용히 마을을 빠져나왔다.

여자친구는 꼭 가야 되냐고 묻긴 했지만, 말리진 않았다.

떠나기 전 작고 둥근 손으로 그의 털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작은 쌀떡 하나를 주머니에 넣어주었을 뿐이다.

“잘 다녀와.”

걱정과 믿음, 응원을 꾹꾹 누른 한 마디였다.


길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겪었던 공포와 무서움을 헤치고

친구를 돕기 위해 가는 길이라는 걸.


서울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여전히 불빛은 눈부셨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녔다.

담벼락에 고양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지만

시골쥐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서울쥐가 사는 집 앞에 도착했을 땐 적잖이 당황했다.

창문들은 깨져 있었고,

가구들과 바닥은 먼지에 덮여 있었다.


망가진 가구들 사이를 헤치며 낡은 장롱에 다다랐을 때

기운 없이 누워있는 서울쥐가 보였다.

“서울쥐!”

시골쥐가 다가가자, 서울쥐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는 시골쥐를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 정말… 왔구나.”

시골쥐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울쥐를 조심스레 일으켜 세웠다.

한쪽 다리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주인이 이사 가면서… 짐을 정리 안 하고 다 내팽개치고 갔어.

짐을 챙기던 옷가지 사이에 다리가 꼈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어.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다리가 없어졌었어.

음식은커녕 고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게 천운이라 생각해."

시골쥐는 말없이 서울쥐의 몸을 부축하고,

따뜻한 털옷을 꺼내 입혀주었다.

얼마 남지 않은 쌀떡을 조심스럽게 꺼내 서울쥐에게 건넸다.

한 입 먹자마자, 서울쥐는 눈시울을 붉혔다.

“… 맛있다. 이거… 시골에서 가져온 거지?”

“응. 우리 집에서 수확한 쌀이야.”

서울쥐는 쌀떡을 먹은 뒤 다시 잠이 들었다.

시골쥐는 잠이 든 서울쥐를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시골쥐는 무너진 집 부엌 한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버려진 우유병, 남은 빵 부스러기, 깨진 컵,

그리고 먼지 낀 딸기잼 병 하나.

재료들을 본 순간,

시골에서 만들던 감자케이크와 해바라기씨 파이가 생각났다.

시골쥐가 빵 조각에 딸기잼을 곁들여 조심스레 만든

한 입 크기의 파이를 먹으며 서울쥐는 점점 건강을 되찾았다.


그날 이후, 시골쥐는 남겨진 재료들로 작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계도, 레시피 책도 없었지만

시골쥐의 손끝엔 자연이 있었다.

도시에서 버려진 것들로

시골의 지혜가 담긴 요리를 만들어내는 그 모습은

낯설지만 신기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서울쥐도 시골쥐를 돕기 시작했다.

가장자리가 찢긴 비닐을 포장지로 쓰고,

깡통 뚜껑으로 만든 접시에 음식들을 올렸다.

작고 낡은 창틀 아래,

두 쥐가 밤마다 가판대를 차리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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