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한 알』 장석주 (글), 유리 (그림) | 이야기꽃 | 2015년
합기도 관장님에게 카톡이 왔다. 한 달에 한번 있는 아이들 심사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비장한 표정, 절도 있는 동작, 몰입한 눈빛…….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던 아이들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놀라웠다.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최근 글쓰기 강좌에서 알게 된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란 시의 첫대목이다. 2009년 가을, 광화문 교보문고 글판에 걸릴 정도로 유명한 시였다는데, 나는 글쓰기 강좌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작가라고 불리는 유리 작가가 그림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내며 이 시에 생명력을 더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추나무 밑에서 '도둑'이라는 오명까지 쓰며 그림책 '대추 한 알'에 입힐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장석주 시인의 시는 유리작가를 통해 그림책 '대추 한 알'로 다시 태어났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시, 긴 시간에 걸쳐 그려진 그림. 위대한 그림책임이 분명했지만, 처음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새 그림책들이 쏟아지는 시대. '대추 한 알'도 그저 그림이 예쁜 책 중 하나였다. 나태주 시인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던지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처럼 익숙한 문구도 아니니 뜻도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짧고, 좋은 시.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란 문구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내가 아이들을 키우며 밖에 나가지 못해 힘들어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회사 생활로 늘 피곤해하는 남편이 생각났고, 사춘기에 들어서며 아이가 말을 안 한다고 힘들어하는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퍼져나가 스쳐 지나간 사람들까지 닿았다.
'우리 모두 저절로 붉어지진 않았구나...'
자연스럽게 다음 문장이 이어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언젠가 남편에게 나와 왜 결혼했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아는 언니가 며느리를 얻은 후 결혼한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며느리는 '딱히 이유가 없고, 결혼해야 할 것 같아서 했다'라는 대답으로 언니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자식의 자랑이나 사랑하니까라는 대답을 들을 줄 알았던 언니는 무슨 이유가 없을 수 있냐며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남편은, 나와 왜 결혼했을까?
양손을 펼쳐 턱밑으로 꽃모양을 만들어 장난스럽게 물었다.
'오빠는 왜 나랑 결혼했어?'
남편은 휴대폰을 잠시 멈춘 뒤 내 얼굴을 보았다.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나와 눈이 마주친 남편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못돼서"
황당해하는 나를 뒤로 한채 남편은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 주먹을 들어 보이며 '죽는다?'라고 말했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인정하기 싫지만 남편의 말은 맞았다. 결혼 전 난 참 못됐다. 이기적이고 뻔뻔했으며,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내 모습은 바꿔놓은 건 아이였다. 자기 멋대로 구는 아이를 통해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재촉해도 자기 속도대로 크는 아이들을 보며 시간이 필요한 일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결국 나는 조바심이나 속도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힘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직 '못됨'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지만, 결혼 전 아주 못됨에서 지금은 조금 못됨 정도로 둥글어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정말 혼자서 둥글어진 건 아니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사연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대추 한 알'은 저마다 갖고 있는 사연과 이야기로 인해 붉어지고, 둥글어진다고 얘기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대추 한 알'을 천천히 읽었다. 이렇게 천천히 그림책을 본 건 처음이다. 책장을 넘기며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뛰어가는 모습과 논에서 일하시는 아버지의 모습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폈다. 천천히 보니 강좌에서 들었던 떨어진 대추, 붉게 물든 대추의 모습이 보였다. 미쳐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벌과 나비, 허수아비가 보였다. 그냥 지나쳤던 장면들이 하나하나 새롭게 보였다.
쑥갓을 캐고 있는 엄마와 딸 그림을 보며 매년 봄마다 쑥버무리를 만들어주시는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이 이 책을 두고 말한 것 같다. 앞으로 힘든 일이 생기면 '더 붉어지려고, 더 둥글어지려고 이런 거구나.'하고 조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도 붉고 둥근 대추가 되기 위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듯 너희에게도 앞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말해줬다. 그럴 때마다 '나도 잘 크려고 그러는가 보다.'하고 다시 힘을 내서 앞으로 나가라고 얘기했다.
아직 어린아이들은 엄마의 말보다 얼른 책 읽고 핸드폰 보는 일이 우선이다. 언젠가는 엄마가 한 말이 문뜩 생각나는 날이 있겠지. 이왕이면 지치고 힘든 어느 날에 이 문장이 너희의 마음을 위로해주면 좋겠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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