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주는 어른이 있다는 것

『나도 박지원처럼 기행 일기 쓸래요! 』|조민희 (지은이)|키큰도토리|

by 더 로사 The ROSA

도서관에서 아이가 책을 가져왔다. 박지원의 책이었다. 기행 일기라는 제목이 끌린 걸까? 아니면 글밥이 적어서? 아이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그냥'이란 답변이 돌아왔다. 그냥 끌렸던 책은 며칠째 가방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안달이난건 내쪽이었다. 책을 읽다 재미가 없어 덮어버린 거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빌려놓고 펼쳐보지도 않는 책이라니... 자기 전 읽어주고 있었던 책은 다음으로 미루고 아이가 빌려온 박지원의 책을 펼쳤다. 열하일기라는 캐릭터가 나왔다. 박지원이 자신을 썼다는 소개와 함께 박지원의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가 시작됐다.


될 성 푸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박지원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호기심과 기억력을 보였다. 박지원의 비상함을 알아본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박지원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박지원이 다섯 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가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면서 할아버지만 가족과 떨어져 관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박지원은 할아버지가 새로 머물게 된 관아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함께 갔다. 놀라운 것은 다음날부터 할아버지가 계시는 관아로 매일같이 찾아간 것이다.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 혼자 말이다.


매일같이 한 시간 거리를 자신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손자가 안쓰러웠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관아 옆에 가족들이 살 집을 구했다. 그 집은 너무 낡고, 오래돼서 리모델링이 필요했다. 리모델링을 하는 모습을 박지원이 놓칠 리 없었다. 집이 고쳐지는 모습을 하나하나 기억해 뒀던 박지원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든든한 신임을 얻으며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공부방을 지었다.


핵가족화가 되면서 조부모님과 직접적인 만남과 연락의 기회가 줄어들었다. 가족실태조사에서 확인되는 가족 형태 분포의 변화는, 요즘 아이들이 조부모와 다소 서먹한 관계를 맺게 되는 사회적 배경을 보여준다. 주변 친구들에게도 명절 때나 조부모님을 찾아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나의 경우엔 연애 때부터 신랑이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불편하고 싫었지만 차츰 내가 더 부모님을 뵈러 집에 가자고 조르게 됐다. 무조건적으로 사랑과 믿음을 주시는 부모님에게 계속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 그랬던 것 같다.


감정이 쉽게 앞서고 급한 성격을 지닌 나에게 아이를 낳은 후 시부모님 곁에서 살아야겠단 선택은 필연적이었다. 아이는 아이 스스로 잘 자라고 있었지만 내 불안전한 성격은 아이를 망칠 수 있었다. 그나마 옆에서 지켜보는 어른이 있다면 행동을 자제할 수 있을 텐데, 지방 근무를 하는 남편은 주말에야 왔다. 친정 엄마는 일을 하느라 바쁘셨다. 아이를 낳은 뒤부터 시부모님 댁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거렸다.


운이 좋았다. 1남 2녀 집안의 막둥이. 어렵게 얻은 아들이 바로 남편이었다. 그 남편이 또 늦게 결혼한 탓에 손이 귀했다. 결혼 안 하겠다던 아들이 데려온 여자란 이유만으로도 큰 환영을 받았다. 한 것도 없는데 매번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데리고 매일처럼 찾아가니 입이 귀에 걸리셨다.


내 입장에선 시부모님께 찾아가는 시간이 육아에서 잠시 해방되는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를 봐주시는 틈을 타서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영화나 티비를 봤고, '엄마, 아빠'가 아닌 어른들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가끔 어머님께 아이를 맡긴 뒤 아버님과 술을 마셨다. 나중엔 아예 아이를 맡겨놓고 운동을 다니기도 했다. 어른들과 함께하니 행동을 조심하게 됐고, 숨이 좀 트이니 아이에게 내던 짜증과 화를 줄일 수 있었다.


제일 좋은 건 아이들이 먼저 알아챘다. 난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편을 들어주시는 분들을 처음 봤다. 돌이 지나 걸음마를 걷기 시작한 아이는 '똘똘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똘똘해서 넘어지면 아픈 걸 아니깐 걷지 않는 거라고... 밤에 쉽게 잠이 들지 못하는 건 상상력이 풍부해서였고, 툭하면 울어보리는 건 나중에 가수가 되려고 목청을 크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지식에 연륜이 더해지니 여유로움과 지혜가 생겼고, 아이들도 안정적으로 잘 자라났다.


부모님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아이들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아이가 우는 이유, 옆에서 한없이 얘기하는 이유가 모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즐겁지만, 커가는 아이들만큼 불안감도 증폭하고 있다. 아빠 외벌이로 빠듯한 살림에 나가서 일을 하며 조금이라도 보태야 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이 커서 나중에 왜 우리 집은 돈이 없냐고 말하면 어떡하지? 걱정이 앞섰다. 부모님께 일을 해야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돈을 벌기 위해서.


'지금은 좀 힘들겠지만 아이 보는 게 돈 버는 거야. 아이 잘못되면 나중에 돈이 더 많이 들어. 돈은 들어올 때 되면 알아서 들어오니 지금은 아이 보는데 집중해. 그게 돈 버는 거야.'


바로 코앞만 바라보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나와달리 부모님은 넓은 숲을 바라보며 삶은 조망하고 계셨다.


무조건적으로 믿어주시고 응원해 주는 부모님이 계신 것. 그것은 큰 행운이다. 이 믿음을 받은 아이처럼 나도 누군가를 믿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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