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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상 Nov 06. 2019

여자는 이런 거 하는 거 아니야

이 세상의 모든 H에게

제과제빵업 종사자 중에는 남자가 참 많다. 최근에는 디저트의 영역이 심화되고 직장 내 성평등이 거론되면서 여자의 비율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남자가 훨씬 더 많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을 했을 테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일의 강도가 높고 그에 따라 강한 체력이 요구되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 글에서도 말했듯 이 업계는 참 일하기 힘들다. 철판부터 시작해서 반죽기의 통까지 크고 무겁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작업실 도처에는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동트기 전에 출근해서 해질 무렵에야 퇴근을 한다. 30kg나 되는 반죽을 번쩍번쩍 들어야 하고 잠을 쪼개가며 일해야 하니 체력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남자라고 무조건 체력이 강하다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여자라고 무조건 이런 상황에서 나가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하루는커녕 반나절 일하고 도저히 못하겠다며 앞치마를 벗어던지는 남자도 있고, 그 열악한 환경에서 십 년 동안 일을 하는 여자도 있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보다 물리적인 힘이 세고 체력이 강한 것은 일반적인 사실에 가깝다. 나도 일을 배우면서 힘이 모자라거나 몸이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질 때마다 남자의 몸이 부러운 적이 많았다.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일을 하며 제일 불편했던 적은 따로 있었다. 


"여자는 이런 거 하는 거 아니야."


바로 이 말을 들을 때다.     

 



"여자는 이렇게 무거운 거 드는 거 아니야."

"에이, 이런 건 남자가 하는 게 맞지."

"남자 두고 여자한테 이런 일 시키면 욕먹어."


놀랍게도 이 발언들은 모두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입학하던 해에 휴학을 하여 내가 2학년이 올라가던 해에 학교로 돌아온 복학생 H는 입만 열면 여자 남자 타령을 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소중한 여동생을 위해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다던 그의 철학은 이러했다. 무거운 것은 반드시 남자가 들고, 위험한 일은 반드시 남자가 해야 한다. 여자는 다치지 않도록 늘 지켜줘야 하는 존재이고, 아름답게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남자는 기꺼이 거름이 되어주어야 한다.


어떤가. 그의 철학에 환호를 지르며 기립박수를 칠 여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당시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기립 박수고 나발이고 주둥이에 빨래집게라도 집어주고 싶었다.


나는 힘이 세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외가 쪽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허벅지가 튼실하고, 팔뚝은 두껍지 않아도 아귀힘만은 학교에서 체육선생님을 제칠 정도로 셌다. 초등학생 때도 엄마와 장을 보러 가면 쌀포대를 어깨에 이고 돌아왔다.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아무 생각 없이 들어 올린 반죽통이 30kg나 되어 수셰프님을 놀라게 한 일화가 아직도 술자리에서 나올 정도이니, 내가 약골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내게 철판이나 10kg 상자 정도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물론 나의 물리적인 힘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있거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요청한다. 힘자랑하다 허리라도 다치거나 큰 손해를 보면 그보다 미련한 것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내가 철판 몇 장 들어 올릴 때마다 불이라도 난 것처럼 뛰어와서는 "날 시키지 여자인 네가 왜"를 외치는 H를 볼 때마다 나는 그 미련한 힘자랑도 필요한 걸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무슨 명대사라도 날린 듯 씨익 웃는 H의 얼굴에는 침 한 번 뱉어보고 싶었다.


사실 입 안의 침을 끌어모으게 했던 것은 H뿐만이 아니었다. 여학생들은 몸이 약하니 남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는 전공 교수나, 어렵지 않아 보이는 일이나 충분히 들 수 있을 법한 일도 H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애교와 함께 떠넘기는 일부 여자 동기들도 보기에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H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첫 직장은 전체 직원 중 80퍼센트가 여자고, "여자 남자 떠나서 되는 사람이 한다."가 회사 철칙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불편할 만한 상황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가게에서 힘이 제일 센 여자 선배가 남자 선배들을 제치고 냉장고와 반죽기를 휙휙 옮겨 나른 적도 많았다. 남자 선배들도 H의 꽃타령 같은 허접한 말 대신 "완력이 좋으시네요. 언제 한 번 같이 덤벨 해보실래요?"같은 말을 했다. <진짜 사나이> 촬영을 위해 군대를 가려한다는 박승희 선수에게 "너 메달 따서 군입대는 면제되지 않느냐"라고 묻던 이규혁 선수가 떠오르는, 편견 하나 없는 좋은 자세이다.




이름과 얼굴, 나이나 직업만 다를 뿐 H는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


우리 아빠는 아직도 내가 전동드릴만 들면 불 앞에 선 아이를 대하듯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한다. 장정 셋으로도 감당이 되지 않던 커다란 반죽기를 옮기는 것을 도운 내게 멋쩍은 얼굴로 "너한테 그런 걸 도와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무튼 도와줘서 고맙다."라고 말하는 선배도 있었다. 인기 있는 드라마에도 여주인공의 볼을 쓰다듬으며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도록 지켜주겠다는 말을 하는 남주인공들이 자주 보인다.


아마 H들에게 여자란 날아가지 않게 바람을 막아주고, 스러지지 않게 온몸으로 지켜줘야 하는 존재일 것이다. 여린 꽃을 위해 거름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무거운 것도 아무렇지 않게 들어내는 자신의 모습에 취해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H들아.


여자들도 스스로 얼마든지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매일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운동을 하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나르고 철판을 다섯 장씩 드는 것은 당신들만의 성역이 아니다. 이 업계에서 일하기 위해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업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정 도와주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면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정중하게 도움을 구할 것이다. 그 호의는 참 고마우나, 호의라고 하여 받는 사람이 모두 편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무엇을 해도 되는지는 회사 규율이 정하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내 마음이 정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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