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무게를 안고 태어난 그녀의 큰 아들
'또 전학이야..'
이제 막 중학교 1학년 입학한 그녀의 큰 아들은
새 학기 반장이 되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표를 얻고 말이다.
말수도 적고 점잖은 아이지만
어디에 있으나 주변에 친구들이 모여들고
선생님들의 신뢰도 두터운 그런 아이였다.
남편의 잦은 전근으로 인해
전학을 1,2년에 한 번씩,
어느 때 에는 한 학기마다
전학을 다니기도 했다.
그래도 어느 학교에서나 큰 문제없이 다녀 주었고
친구들도 항상 끌고 다녔기에
그녀는 큰 아들에 대해서는 걱정이 없었다.
어쩌면
그보다 눈앞에 닥친 문제들이 더 많았기에
아이들의 힘듦은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녀의 큰 아들에게
하나뿐인 내 아들의 첫 아이,
"우리 장손 우리 집 기둥"
이라며 태어날 때부터
이 아이의 두 어깨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었다.
그러던 그 아이가 다섯 살 무렵,
이 가족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시련이 다가왔다.
홍역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체온은 40도를 훌쩍 넘겼고,
한 달이 다 되어갔다.
어떤 해열제를 써도 항생제를 써도
열은 식을 줄 몰랐다.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다섯 살 아이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의 선고가 이어졌다.
그녀는 정신이 아득했다.
기도가 아니라 절규였고,
신에 대한 원망은 하늘을 찢을 듯 터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성당에서 받아 온 성수물로
아이의 얼굴과 몸을 수없이 닦고 또 닦았다.
그날 밤,
그녀는 아이의 체온만큼이나 뜨거운 눈물을 쏟고
지쳐 쓰러졌다.
다음날 아침, 믿기지 않는 기적이 찾아왔다.
아이의 손이 따뜻하되 뜨겁지 않았고,
그의 숨결은 차분하고 일정했다.
열이 내렸다.
병원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 했다.
하지만
“고열로 인해 뇌에 손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모든 연골이 녹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정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이
다시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또래보다 훨씬 작았던 큰 아들은
학교 입학 후
숫자 셈도 잘했고, 수업도 잘 이해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녀의 걱정은,
다만 체구가 너무 작아 아이가 걸어가는 건지
가방이 걸어가는 건지 모른다는 정도에 그쳤다.
그 작은 아이가
덩치 큰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는데,
끝까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며 떨어지지 않아
결국 덩치 큰 그 친구가 울며 나 좀 집에 보내 주라며
사과를 받아 낸 적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 헤쳐나가던 그 아이는
이번에도 괜찮으리라는 어머니의 안심과는 달리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아무리 친구와의 작별이 익숙해졌다 하나,
한 학교에서 뿌리를 내릴 기회조차 없는 그 현실이
중학교 1학년 남학생에게는
너무도 잔인했을 것이다.
그녀는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 했지만,
큰 아들은 그저 묵묵히 짐을 쌌다.
그렇게 왔던 이 먼 곳에서
식구들이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큰 아들은 자신도
고등학교 선생님댁에 잠시 맡겨졌지만,
사실은 선생님댁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어머니 앞에서는
알겠다고 걱정 마시라고 했지만
사실은 학교 보건실에서 지내라 했다.
식사도 도시락도 물론 없었다.
자신의 상황을 아는 몇몇의 친구가
도시락을 매번 돌아가며 대신 양보해 주었다.
그러나
원망하거나 투정할 수도 없었다.
그럴 곳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조금만 버티면 졸업이니 벗어날 수 있어'
일단 졸업해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둘째 동생을 데려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버텼다.
그렇게,
기적처럼 살아난 이 아이는
살아난 대가로
다시 장남의 무게를 지며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