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
그녀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장마가 막 시작되는 끈적끈적한 어느 날,
대학을 다니는 친구 녀석을 따라 강의실까지 들어갔다.
300명은 충분히 들어갈 만큼 큰 계단식 강의실
친구와 강의실 한쪽 구석에 앉았다.
창틀 너머로 오랜만에 쨍한 햇빛이 흘러들어 왔다.
나른한 오후 무렵의 강의실이었다.
그녀가 앞쪽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강의실은 문이 앞쪽밖에 없었기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하얀, 동그란 안경을 쓰고
눈웃음이 얼굴에 배어있는 고등학생 같던 그녀가
누군가를 향해 밝게 웃으며 걸어 올라오다
내 친구 녀석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이미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그녀의 환한 미소에 시선이 멈추었다.
따뜻했다.
어떻게 나를 받아줬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저 그녀를 만나며 나는 지금껏 받지 못했던
따뜻함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참 많이 웃었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마다
오래된 나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갔다.
그녀는 가끔씩 아팠다.
한 번씩 고열이 나서 며칠씩 집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며칠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나와서는
다시 또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주었다.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중학교 때 혈액암이었다 한다.
치료를 받고 기적같이 살아났다 한다.
하지만 평생 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딸은 언제 또 힘들어질지 모르니,
안정된 사람을 만나야 한다며
조용히 힘겹게 말을 전해왔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를 지켜줄 힘이 없었고,
그녀에게는 내가 아닌 더 좋은 세상이 필요했다.
이별을 말하고 나니
나는 다시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세상을 맞게 되었다.
아니, 훨씬 더 아프고 외로운 세상이었다.
모진 말들로 그녀를 아프게 한 만큼
내 심장은 더한 차가운 얼음칼이 꽂힌 채
얼어붙어갔다.
그렇게 알아버렸다.
사랑이 이렇게도 따뜻하다는 것을
동시에 이렇게도 잔인하다는 것을.
- 진영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끌렸다.
그는 강의실 맨 뒤편에 앉아 있었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눈이.. 그의 그 눈빛이..
설명할 수 없이 슬펐다.
그것이 이상하게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는 어딘가 망설임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모든 것이 좋았다.
한순간에 그냥 그의 모든 것이 받아들여졌다.
누군가에게서 상처가 오래 쌓이면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을
나는 이미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하던 평범한 날들이 참 따뜻했다.
하지만 내 몸이 완전히 괜찮지는 않았다.
중학교 때 한순간에 무너졌던 날부터
괜찮을까..라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열이 나고 며칠씩 앓아눕고 나면 덜컥 겁이 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그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
나를 지켜주기에는 힘들어 보인다며..
나는 다시 아플 수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힘든 그에게 나마저 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의 이별 통보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 밖으로 나오는 모진 말 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찢겨 나갔다.
그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데..
그는 도망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를 보내준 것이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웃던 순간들,
그리고 나를 위해 스스로에게 칼을 찌르던 이별의 밤.
모든 순간들을 잊을 수가 없다.
아프다.
우진아.. 나는 아직 살아 있고 웃고 있어.
부디 어딘가에서 따뜻한 날을 보내고 있기를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