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춤

발레리나와 피아니스트

by 솔내음

공연장의 육중한 문이 닫히고 조명이 꺼졌다. 마지막 음의 잔향이 허공을 떠돌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에 휩쓸려 사라졌다. 나는 곁에 앉은 지안을 곁눈질했다. 그녀는 평생을 토슈즈 위에서 살아온 발레리나였다.

"어땠어? 오늘 쇼팽은 꽤 섬세했던 것 같은데."

나의 질문에 지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공연장 로비를 빠져나와 차가운 밤공기가 뺨에 닿을 때쯤에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대답은 음악 비평이라기보다, 무대라는 성소(聖所)를 대하는 수행자의 일갈에 가까웠다.


"연주자가 무대로 걸어 나올 때, 그리고 인사하는 태도가 아쉬웠어. 왜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시선은 바닥만 훑었을까? 연주자가 무대에 발을 내딛는 그 첫 걸음부터 이미 음악은 시작된 건데 말이야."


그녀의 말에 나는 멈춰 섰다. 건반 위의 소리에만 매몰되어 있던 나의 시선이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사실 나에게도 버릇이 하나 있다. 연주자가 피아노 의자에 앉기 전, 그들의 걸음걸이를 보며 소리의 색을 상상하는 일이다.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가볍게 걸어오는 이의 소리는 대게 맑고 투명하다. 반면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바닥을 응시하며 무겁게 걷는 이는 피아노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고통스러운 심연의 소리를 들려주곤 한다. 허리를 곧게 펴고 건반을 다독이듯 앉는 이는 마치 세상을 관조하는 신선의 소리를 낸다.


"지안아, 네 말을 듣고 보니 피아니스트도 결국 무대 위의 무용수네."


나는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단 하나의 타건을 위해 피아니스트는 온몸을 조율한다. 마치 골프 선수가 비거리를 내기 위해 강렬한 백스윙을 가져가듯, 혹은 부드러운 퍼팅을 위해 온몸의 힘을 빼듯, 피아니스트의 예비 동작은 소리를 만들기 위한 '보이지 않는 춤'이다. 손가락 끝에서 손목으로, 팔꿈치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그 거대한 흐름. 페달을 밟는 발끝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훈련된 제스처다. 건반 위에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손의 궤적은 발레리나가 무대 위에서 그리는 우아한 아라베스크와 무엇이 다를까.


우리는 밤거리를 나란히 걸으며 발걸음을 맞췄다. 지안은 원래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발레리나였고, 나는 한때 발레리나를 동경했던 피아니스트였다. 운명은 우리를 서로의 꿈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정점에 다다른 지금 우리는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는 소리로 춤을 추고, 발레리나는 몸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거지."


지안이 가볍게 턴을 하듯 내 앞을 가로질러 걸었다. 가로등 조명이 그녀의 실루엣을 비추자, 텅 빈 보도가 순식간에 화려한 무대로 변했다. 관객도, 악기도 없는 고요한 거리였지만 내 귀에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흐르는 듯했다.


"다시 태어나면 말이야, 난 꼭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지안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보폭에 맞춰 발을 뻗으며 대답했다.


"그럼 난 발레리나가 될게. 네가 연주하는 선율 위에서 가장 높이 뛰어오르는 무용수가 되고 싶어."


밤하늘 아래, 우리의 발걸음은 리듬이 되고 몸짓은 선율이 되었다. 서로를 마주 보며 짓는 미소 속에 어릴 적 간직했던 낡은 꿈들이 반짝였다. 무대 밖에서도 우리의 연주는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