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 인생의 3막

오래 전의 일기

by 솔내음

“인생이 두 번이라서 두 가지를 다 경험해 볼 수 있으면 좋겠어. 그래야 어느 길이 내 적성에 맞는지 확실히 알 수 있잖아.”


중학생이 된 막내아들이 툭 던진 말에 마음이 묘해졌다. 어느새 훌쩍 커서 인생의 방향을 고민하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그 나이대에 짊어진 고민의 무게가 안쓰러워 마음이 쓰였다.




사실 나는 아들만 했을 때 그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시작한 피아노를 전공으로 택하기까지, 마치 정해진 궤도를 걷듯 당연하게 건반 앞에 앉았다. 피아노를 그만두고 싶다거나 다른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품어보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 길이 늘 꽃길이었던 것은 아니다. 연주를 앞둔 무대 뒤, 조명을 받는 검은 피아노는 때때로 나를 잡아먹으려는 '검은 괴물'처럼 보였다. 연습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날이면 관객의 시선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었고, 무대 위의 나는 마치 구경거리가 된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초라해지곤 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나를 아는 지인들의 예의상 건네는 박수보다, 나를 전혀 모르는 이들 앞에서 오직 음악으로만 평가받고 싶다는 갈증이 늘 나를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술가가 부러웠다. 화가는 무대 뒤에 숨어 홀로 작업할 수 있고, 무엇보다 틀린 선을 언제든 다시 지우고 그릴 수 있다는 점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한 번 짚어버린 오음(誤音)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피아니스트에게, 미술의 '수정 가능함'은 구원처럼 보였다. 무대로 나가는 공포의 순간마다 나는 "왜 나는 피아노를 전공했을까"라며 자책 섞인 후회를 삼켰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문득 대학교 졸업 무렵 재미로 찾았던 철학관 노인의 말이 떠오른다. "이제 인생의 2막이 펼쳐지려 하네." 그 말 한마디에 가슴 설레던 청춘의 나는 지금 어디쯤 서 있을까.




아마도 나는 총 5장으로 구성된 인생이라는 긴 연극 중, 이제 막 '제3막'의 막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평생 피아노만 치던 내가 요즘은 글을 쓴다. 그리고 동경하던 그림도 그린다. 아들은 두 번의 인생이 있어야 두 길을 가볼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한 번뿐인 인생 안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막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완벽한 연주를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긴장을 내려놓고, 지우고 다시 쓰고 그려도 괜찮은 노트북 앞에, 캔버스 앞에 앉아본다.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설렘으로, 나는 내 인생의 다음 장을 향해 조심스럽지만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