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귀가 쉬어가는 곳, 코펜하겐

Day 1

by 솔내음

떠날 결심

3년 만이다. 세상이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른 듯 고요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해외여행의 길이 조심스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귀국 전 검사에서 양성이 나오면 낯선 땅에 10일간 고립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덴마크 학회에 함께 가자는 언니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가방을 꾸렸다. 불안을 설렘으로 바꾸는 '떠날 결심'을 마친 채로.


헤어질 결심

오랜만의 여행이라 긴장했던 탓일까. 서울에서 13시간을 날아 도착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 환승 게이트를 향해 숨 가쁘게 뛰어가던 중, 에스컬레이터에서 잠시 손을 놓은 캐리어가 균형을 잃고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내 가슴도 내려앉았다. 당황한 나는 본능적으로 에스컬레이터를 역주행했다. 운동신경도 순발력도 없는 내가 저지른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오직 '내 가방을 잡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다시 일으켜 세운 가방은 처참한 '부상병'의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깨지고 부러진 가방을 보며 깨달았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 까지구나.' 결국 면세점에서 거금을 들여 새 가방을 샀다. 정성껏 개어 넣었던 옷가지들을 새 가방으로 거칠게 옮겨 담고 돌아서는 길, 가슴 한구석에 휑한 구멍이 뚫린 기분이었다. 구석에 버려진 옛 가방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는 듯했다.


"나를 이런 낯선 곳에 두고 떠나나요..."




애써 외면하며 탑승구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미국에 떼어놓고 와야 했던 딸아이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익숙한 것을 낯선 곳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마음은 늘 이토록 쓰린 법이다. "미안해,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바쁜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내 마음은 자꾸만 그 낡은 가방이 머물던 구석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세 자매의 상봉

한국과 미국에 흩어져 살던 세 자매가 뭉쳤다. 포르투갈 리스본 이후 몇 년 만의 조우인가. 언니와 나도 차로 15분 거리에 살면서도 지난 몇 년간 카톡과 전화로만 안부를 물었을 뿐이었다. 공항 철도역에서 마주 본 언니의 얼굴.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교환하며 짧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그 한마디에 그동안 쌓인 서먹함이 녹아내렸다.




현지인처럼 살아보고 싶어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 하지만 8월 말 코펜하겐의 태양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땀을 닦으며 에어컨부터 찾았지만, 북유럽의 고풍스러운 아파트 어디에도 에어컨은 없었다. 집주인에게 환영 인사 대신 "에어컨 없나요?"라는 질문부터 던진 우리. 리스본에서의 시행착오가 반복되는 순간이었다.


당장 취소하고 호텔로 옮길까 고민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가려던 호텔조차 에어컨이 없단다. 오히려 이 아파트가 훨씬 쾌적하고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코펜하겐의 첫인상: 자전거와 여유가 흐르는 도시

비로소 눈을 들어 도시를 바라본다. 화려한 광고판 대신 절제된 느낌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자동차보다 훨씬 많은 자전거가 물결처럼 흐른다. 아, 드디어 덴마크에 왔구나.


음악 없는 카페, 소리 없는 강아지:

카페에는 요란한 음악 대신 사람들의 낮은 담소가 흐른다. 길가에 주인과 함께 앉아 있는 강아지들조차 짖지 않고 고요하다.


자전거의 나라:

어디를 가든 자전거 전용 도로가 완벽하게 닦여 있다. 사람들은 지하철에서도 책을 읽고, 자기 나라 말로만 조용히 안내방송을 내보낸다.


뉘하운(Nyhavn): 찍으면 엽서가 되는 풍경

코펜하겐의 심장, 뉘하운 운하로 향했다. 형형색색 파스텔 톤의 건물들과 운하에 떠 있는 배들이 만드는 풍경은 셔터를 누르는 곳마다 예술이 되었다. 72시간 코펜하겐 카드를 이용해 크루즈에 올랐다. 암스테르담의 운하와는 또 다른 청결함과 여유가 느껴졌다.


운하 근처에 걸터앉아 햇살을 즐기며 대화하는 연인들, 유람선이 지나갈 때마다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편안한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25%라는 높은 부가가치 세율과 물가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들을 보며, 일보다는 가족과 삶의 여유를 귀하게 여기는 덴마크식 행복 '휘게(Hygge)'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셋이서 셀카를 찍고 있으면 누군가 다가와 "사진 찍어줄까요?"라고 묻는다. 코펜하겐의 친절은 이 도시의 하늘만큼이나 맑고 투명했다.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숨 쉬며, 매일 만 오천 보를 걸어도 피곤한 줄 몰랐던 첫날. 벌써부터 이곳에서 한 달쯤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