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body I Used to Know
치매는 흔히 ‘나를 잃어버리는 병’ 혹은 ‘영혼의 죽음’으로 묘사되곤 한다. 영화 <더 파더>나 <스틸 앨리스>가 보여주듯,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갈 때 인간이 느끼는 공포는 상상하기 어렵다.
웬디 미첼(Wendy Mitchell)은 저자 아나 와튼(Anna Wharton) 눈을 빌려 기록한 이 책 『내가 알던 그 사람 (Somebodly I used to Know )』을 통해 우리에게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녀는 치매를 단순히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치매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몸소 보여준다.
기억이란 뇌가 받아들인 인상과 경험을 간직하는 것이지만, 웬디 미첼에게 기억은 ‘따뜻함’ 그 자체이다. 미래를 잃어버린 치매 환자들에게 과거는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안식처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젊은 시절 모습이 문득 떠오를 때, 그 기억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하루를 버티게 하는 ‘치료제’가 된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안개’가 아닌 ‘아지랑이’라고 부른다. 안개는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지만, 아지랑이는 언젠가 걷힐 연무 아래 여전히 ‘나’라는 본질이 존재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비록 뇌가 혼돈에 지배당할지라도, 아지랑이가 걷히는 짧은 순간마다 그녀는 카드 게임을 하고 아이패드를 켜며 다시 ‘나’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한다.
책 속에서 웬디 미첼이 영화 <스틸 앨리스>의 배우 줄리안 무어를 만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질문에 미첼은 짧고도 강렬하게 답을 한다.
"순간을 위해 살아요(Live for the moment)."
치매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카르페 디엠(오늘을 잡아라)’의 가치를 가장 가혹하고도 절실하게 가르쳐준다. 내일의 은퇴나 주말을 기다리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던 삶에서 벗어나, 나무줄기를 타는 다람쥐를 보고 새소리를 듣는 ‘지금 이 순간’의 작은 꾸러미에서 행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독립성을 잃어갈지언정,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즐기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알츠하이머가 그녀에게 준 역설적인 선물이다.
웬디 미첼은 요양원행을 결심하며 자녀들을 배려한다. 딸들이 자신을 간병하느라 인생을 포기하는 것보다, 안전한 곳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낫다는 그녀의 고백(76p)은 가슴을 울린다. 설령 나중에 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날이 오더라도,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달라는 당부(149p)는 사랑이 기억의 영역이 아닌 ‘감정’과 ‘존재’의 영역임을 깨닫게 한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은 사라져 버려도, 그를 향한 감정은 남는다."
이 책은 치매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병임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인생이 얼마나 짧고 소중한지를 통감하게 한다. 웬디 미첼은 말한다. 자신은 치매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치매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오직 ‘오늘’이라는 선물을 만끽하는 그녀의 모습은 치매 환자뿐만 아니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생사의 중간지대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기에 늦은 때란 없음을, 그리고 여전히 나는 나로서 존재함을 증명한 그녀의 기록에 깊은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