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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y 20. 2022

해결 그리고 소통

MBTI는 참 신기하다. 사람을 16가지의 성격으로만 나눈다는 게 모순인 거 같다가도, 가끔은 그렇게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가끔 인간관계를 가지다 보면 상대방이 너무너무 이해가 안 될 경우가 태반이다. 그럼에도, 아, 너는 원래 그런 성격이지? 맞아. 그랬지. 너는 그럴 수 있겠네... 하면서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물론, 나 자신도 마음 안 들기 일쑤다. 남들처럼 열심히 살지도 않는 거 같고, 남들이 너무 쉽게 하는 것도 나는 별로 해내지 못한다. 주말에는 왜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은지, 금요일 저녁에는 왜 그렇게 잠들기가 싫은지... 애꿎은 유튜브 피드만 계속 내려가면서 말도 안 되는 잡학상식만 늘린다.

그런 나도 나 자신이 인정하는 장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통을 견디기'이다. 나는 그 고통이 끝나거나 해결되기 전에는 그게 뭐였는지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는다. 그냥 혼자 묵묵히 견딘다. 이게 요즘 사회에서는 오히려 좋지 않은 습관일지도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 고통이 남에게 전가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게 내 성격이다.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아빠 차를 빌려서 조금씩 운전을 배우다가, 드디어 내 차를 뽑은 것이다. 내 차를 몰고 직장을 출근하는 그 길이 어찌나 행복하던지. 그래! 난 최고의 안전 운전자가 될 거야! 좌우 앞뒤도 잘 살피고 천천히 몰고 갔다. 내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직장, 퇴근 후에는 강남 한복판에서 미팅도 있었다. 주차장 가는 길도 미리미리 잘 찾아뒀고, 내비게이션도 완벽하게 맞춰놨다.  

작은 골목길에서 나와 큰길로 우회전해서 진입을 하는데, 나는 무리하게 끼어들지 않고 왼쪽을 시종일관 바라보며 직진 차선의 신호가 걸려서 차가 전혀 없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드디어 횡단보도에 파란 불이 켜지고, 그 기회를 틈타 나는 우~회전을 하려는데, 갑자기 살짝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와 어디선가 나왔는지 도저히 모르겠는 할아버지가 내 차 옆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차에서 내렸다. 


으악. 할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못 봤나 봐요. 흑흑 흑흑 괜찮으세요? 병원으로 갈까요?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일어서시더니, 


괜찮네, 자네가 갑자기 움직여서 내가 지팡이로 차를 쳤지. 나를 친 건 아니라네. 그냥 조금 놀라서 넘어진 것뿐이야. 


엉엉 엉엉.. 아니에요. 그래도 같이 병원에 가봐요. 


아니네.. 말하지 않았나. 부딪치지 않았다고. 조심히 가게나.


느릿느릿 일어나신 할아버지는, 놀랍게도 너무나 빠른 속도로 걸어가시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를 그대로 가시게 둘 순 없었다. 나는 급하게 차로 다시 돌아와서,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냈다. 


할아버지, 안돼요. 여기 제 연락처 드릴게요. 연락 주세요! 병원 가보셔야 해요!


겨우 달려가 할아버지의 윗 옷 주머니에 명함을 찔러드렸지만, 할아버지는 마치 본인이 뺑소니 범이라도 되는 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셨다. 멍하니 서있다 빵빵 소리에 정신이 든 나는 다시 차로 돌아와서 벌벌 떨린 가슴을 부여잡고 우회전을 무사히 하고, 10미터 전방에 있는 사무실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코 앞에서 사고가 난 것이었다. 꿈인가? 이게 뭐지. 나는 이제 어쩌지...

그날 어떻게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던 거 같다. 순간순간 경찰이 나를 잡으러 오지 않을까 떨리기도 했다. 근데 나는 뺑소니가 아니잖아. 괜찮아. 괜찮아. 연락 오면 같이 병원 가고 솔직하게 진심을 다해서 하면 돼. 그럼 괜찮아.

문제는 저녁에 강남에 미팅을 갈 자신이 없었다. 다시 운전을 할 생각을 하니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앞으로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주변에는 교통사고를 경험하고는 운전대를 잡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내가 그들처럼 되는 건 아닐까? 이 차는 어쩌지? 하루 이틀 탔는데, 이것도 중고차가 된 거겠지? 나는 그때 왜 우회전을 하면서 오른쪽을 더 상세하게 살피지 않았던 걸까? 왼쪽에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만 신경 쓰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할아버지가 가시다가 쓰러지진 않았을까? 머릿속이 너무나 시끄러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앞으로 계속 운전을 해야 했으며, 나는 이 사건을 회피할 생각이 없고 정정당당하게 죄를 달게 받을 생각이 있으며, 나는 뺑소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래, 이 죄스런 마음을 한 구석에 기억하고 있으면서, 우선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자. 

나는 저녁에 무사히 미팅을 다녀왔으며,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아주 알찬 회의를 잘 마무리했다. 집에 와서도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고, 정말 오랜만에 기도를 살짝 올리고 (그날은 정말 기도가 필요했다) 잠을 잤다. 나의 이 죄스런 마음 한 구석은 언젠가는 해결될 테니 그 전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겠다며, 같이 살고 있는 부모님께도 '운전하고 다니니, 너무 좋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며칠 후 할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명함을 발견한 가족이 할아버지를 추궁해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게 되고, 할아버지의 따님이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왜 지금도 눈물이 날까?) 할아버지는 괜찮으신가요? 정말 죄송해요. 안 그래도 너무 걱정돼서 계속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따님은 그래도 병원에서 검진을 한번 받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으며, 무슨 문제가 있으면 연락 준다고 했다. 결국 별 이상은 없었으며, 그래도 나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부디 할아버지 댁으로 찾아뵙고 싶다고 부탁을 드렸다. 

할아버지 댁은 기찻길 옆 작은 오두막 같은 약간 반지하의 공간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사시는데 그곳이 곧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서 나가기 전까지만 사는 누추한 곳이라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셨다. 


아이고, 젊은 처자가 뭘 그렇게 걱정을 하고 그래. 괜찮다니깐. 여기까지 오고.


할아버지는 조용히 텔레비전을 보시면서 아무 말씀 없으셨고, 연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내게 할머니는 이것저것을 물으시며 손을 꼭 잡아주셨다. (난 원래도 울보다.) 한 시간 정도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가져간 과일도 함께 먹고는, 할머니께 작은 봉투를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고기라도 사드셔요, 너무 죄송해요'라며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저 잠시 적적함을 달래줬던 누군가의 방문이 좋으셨던 것 같았다. 현관문을 나오셔서는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어 주셨다.   


그날이 사고가 난 후 딱 일주일이 된 날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에야 부모님께 이실직고 고해하고는, 운전 중에는 언제든지 사각지대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기억하고는, 정말 오랜만에 푹 잠을 잘 수 있었던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은 철거가 되었고, 지금은 높디높은 아파트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조금 더 좋은 공간에서 편히 쉬실 수 있겠지? 벌써 십 년도 더 된 스토리다. 



뭘, 이렇게 십 년도 더 된 이야기를 들먹거리냐고? 나는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그것이 소통되지 않는다. 그게 어느 정도 해결이 되거나, 혹은 해결될 기미가 보일 때 소통이 된다. 이제 생각해보니 이게 나 자신에게는 장점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요즘 나에게 본인의 힘든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어떤 조언이라도 주고 싶다만, 나와는 너무 다른 환경이라 나의 조언은 그들에게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단다. 그냥 들어만 달랜다. 아... 정말 미안한데, 내 MBTI는 그냥 들어만 주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고통인걸... 이런 것을 너무 못 견디는 내 모습에 가끔 나는 여자가 아니던가라는 의문을 가질 정도다. (가끔 '남자들은 왜 그렇게 모든 일을 해결할려고들 해? 그냥 좀 가만히 들어주면 안 돼?'라고 말하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멍을 때린다.) 요즘엔 살짝 다른 생각도 섞어가면서 열심히 들어주려고 애쓴다. 그랬더니 신나서들 더 한다. 아...


아이고 어떡해.. 너무 힘들겠다.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 지금 만날래? 진짜 걔는 왜 그러는 건데? 네가 고생이 많다. 


나는 또 멍을 때리며, 영혼 없는 내용을 열심히 찍어댔다. 부디 그들이 오늘 밤은 조금 평안해서, 나도 평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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