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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잘린송 Feb 11. 2022

잠시 소실된 까만 두 점

항상 그 두 눈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까만 점 둘이 없다. 루퍼트는 지금 병원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 다행히 곧 집으로 돌아올 것 같다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라면 아직은 다행인 것이다.


처음 녀석이 많이 안 좋다는 말을 한 의사를 믿을 수 없어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 이제와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놓이면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인간이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가 현실 부정과 망각 아니던가.


오후에 다시 병원엘 방문해 녀석의 상태를 확인하고 입원실 문 틈으로 잘 있나 보고 나니 마음이 좀 놓였다. 의사 선생님에겐 아까 믿지 못한다고 하여 실례가 많았다고 사과했다. 그런 일은 아마 많았을 것이다. 나 같은 보호자가 어디 한둘일까.

정말이지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하물며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너를 책임진다는 말은 '너를 버리지 않겠다'라는 말 이기도 하지만, '너를 학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이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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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대낮부터 와인을 마셨고, 부정적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작업을 했다.

명상도 했다.

명상의 시간을 좋아한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상태.

세상과 반대인 나의 우주 안에서 쉬는 유일한 순간이다.


병원에서 진료비를 수납하고, 집으로 그냥 가기는  그랬다. 사실 모처럼 루퍼트가 혼자 집에 있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외출할  있는 밤이기 때문이다. 날씨가 어쩐지 도쿄 같기도 하고... 도쿄에 있었을  먹었던 야끼교자와 라멘이 생각났다. 일본엔 출출할  아무 때고 먹을  있는 라멘집이 지하철  곳곳에 있다. 숙주가 듬뿍 들어간 라멘 국물  숟갈 떠먹고 나면 마음이 든든해질  같았다. 사실 어느 지역의 맛은 상관없이, 오늘 밤하늘은 일본을 닮았기에 아무 라멘이라도 그리움의 이 난다면야 상관없었다. 그래서 동네 라멘집엘 갔지. 가끔 지나칠 때마다  번은 가보고 싶었던 가게였다.


미닫이 문은 무거워서 여는데 꽤 곤란했다. 문을 열고나니, "어서 오세요". "랏샤이, 랏샤이(이랏샤이 마세, 어서 오세요의 일본말)" 하는 일본말 억양과 비슷한 "어서 오세요"가 나를 반기고. 재밌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삿소끄 나마 비-루(우선 생맥주부터), 라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면발을 입안에 넣는 순간에도 루퍼트 생각에 잠겨 그 무거운 마음이 가라앉으려 하면 손님이 들어왔고 주인장의 "어서 오세요" 매번 그 순간이 반복하며 나를 깨웠다.

덕분에...라는 생각도 들고.


한 그릇 다 비우고 나니 긴장이 풀렸나보다. 피로가 막 몰려왔다. 밤거리를 오랜만에 쏘다녀 볼까 했는데, 하필 오늘따라 누군가의 차에 깔려 죽은 새끼 고양이를 보다니. 더 흉한 꼴을 보고선 루퍼트의 건강과 연관시키는 위험한 짓을 하기 전에 그냥 집에 와버렸다.

건물과 강남 차도에서 밀려오는 수많은 화려한 불빛들이 은하수처럼 반짝였고 그것은 무참히 나의 시신경을 짓밟는   기분을 들게 했다. 그리고 입안에 가득 퍼지는 마늘향, 괜히 떠오르는 80년대 일본 가요, 루퍼트의 보송한 털과 오늘 부재중인  시도 나를 놓치지 않는 시선과, 동물병원 진료비, 얼마  떠나보낸 언니네 고양이, 방금 목격한 새끼 고양이 사체... 감각 과잉상태에 빠져 오늘 밤엔  명상 이외엔 아무것도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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