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적 시각으로 <파스타> 다시보기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겨울방학, 나는 매주 월요일, 화요일 밤이면 TV에 코를 박았다. 당시 인기리에 방영되던 드라마 <파스타>를 보기 위해서였다. 앞머리를 짧게 자른 공효진은 너무 예뻤고, ‘버럭 셰프’ 이선균의 눈알 키스는 두근거렸다. 이선균이 소리를 좀 자주 지르긴 했지만 ‘박력’ 같은 이름으로 포장하면 그마저도 멋있게 보이던 때였다.
드라마 <파스타>는 레스토랑 '라스페라'를 배경으로 한 요리사 서유경(공효진 분)의 성장 드라마이자, 라스페라의 메인 셰프 최현욱(이선균 분)과의 연애담을 다룬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다. 성장 드라마답게 서유경에게는 시련이 주어지는데, 그 시련은 다름 아닌 상사이자 애인인 최현욱 셰프 그 자체다. 최현욱에게는 한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건 바로 주방에 여자를 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최현욱은 라스페라의 메인 셰프로 부임하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멀쩡히 일하고 있던 여자 요리사들을 모두 해고한다.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다시 보니 그마저도 핑계로 보인다) 여기서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내 주방에 여자는 없다.’
물론 서유경은 재능과 노력으로 ‘여성이라는 한계’를 딛고 라스페라에서 다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요리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재능있는 요리사로 인정받는다. 그런 서유경과의 연애를 통해 최현욱도 변화한다. <파스타> 마지막 회에서, 최현욱은 드라마 초반 해고했던 여자 요리사들을 복직시킨다. 그걸 보며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구나, 서유경 덕에 최현욱이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파스타 앓이’는 종영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지만, 아침 7시에 등교해 저녁 11시에 하교하는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됨과 동시에 끝이 났다. <파스타>는 내 기억 속에서 그렇게 잊혔다.
<파스타>가 방영되었던 것이 2010년이니 그로부터 정확히 10년이 흘렀고, 나는 드라마 속 서유경과 비슷한 나이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겨울이 다가와 마음이 헛헛한 탓인지, 문득 겨울이 배경인 <파스타>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다시 <파스타> 정주행을 시작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파스타> 정주행에 실패했다.
마음의 준비를 안 한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엔 몰랐는데,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파스타>를 다시 보니 참 별로더라, 라는 세간의 평가를 이미 들어본 적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더 괴로웠다. 1화부터 그랬다. 셰프 이선균이 ‘내 주방에 여자는 없다’며 여성 요리사들을 해고하는데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연인이자 동료였던 여성 셰프 오세영(이하늬 분)에게 배신당한 적 있다는 설정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16살의 나는 그런 설정 탓에 그를 연민했지만, 26살의 나는 그것이 핑계에 불과하며 그가 한 것이 부당해고라는 것을 안다.
‘내 주방에 여자는 없다’는 명백한 위법이다. 우선 헌법에 어긋난다. 대한민국헌법 제32조 4항에는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 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되어있다. 남녀 고용 평등과 일 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11조, 37조)에 따르면, 최현욱의 행동을 사업주가 묵인할 시 이는 징역감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해고를 한 사업주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최현욱의 행동이 떠올리게 한 것은 ‘어어! 저거 위법인데!’라는 생각보다도, 나의 개인적 경험과 그 일로부터 내가 느꼈던 무력감이었다.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해본 적은 없다. 내가 지금까지 일해왔던 직장들은 대부분 여성 직원의 수가 더 많은 ‘여초’ 회사였다. 그런 ‘여초’ 회사 중 한 곳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의 일이다.
나에게는 한살 많은 인턴 선배가 있었는데, 그는 회사의 몇 안 되는 남자 직원 중 하나였다. 그는 나에게 친절하게 일을 알려주는 편이었지만, 일을 할 때 지나치게 감정적인 면을 보일 때가 있었고, 본인의 감정 상태에 따라 태만하게 업무에 임할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팀장과 의견이 충돌할 때면 팀장이 지시한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식이었다. 팀의 다른 선배들과 굳이 비교하자면 그의 역량은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의 이사님과 점심을 먹는데, 그가 그 선배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걔 뽑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어.” 나는 잠자코 이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사님은 선배와 함께 면접을 본 지원자 중 훨씬 뛰어나게 느껴지는 여성 지원자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왜 선배를 뽑으셨어요?” 그러자 이사님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우리 회사에 남자가 너무 없으니까. 남자 직원을 좀 늘려야겠다 싶었거든. 일종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생각했지… 이게 참, 네 입장에서 들으면 좀 그럴 수도 있는데, 이게 균형이라는 게 생각보다 필요한 거거든.”
그날 이사님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업무 시간 내 마음이 꽤 뒤숭숭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선배가 뽑힌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여초인 우리 회사의 ‘성별 균형을 맞춰야 해서’, 선배는 뽑혔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여도 그랬을까? 그러니까 어떤 회사에 여성 직원은 거의 없고 남성 직원이 대부분일 때, ‘성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여성이 선발되는 경우가 있을까. 그 여성 지원자의 역량이 다른 남성 지원자에 비해 조금 부족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겠지. 여자가 많아도 남자를 뽑고, 남자가 많아도 남자를 뽑겠지, 여자가 뽑히더라도 출산 등을 이유로 언젠가는 일터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겠지. 그런 생각에 미치자 아주 무력해지는 기분이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1월 25일 2020년 ‘적극적 고용개선조치’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전체 공공기관과 지방공사·공단, 500인 이상 민간기업을 대상으로 여성 근로자·관리자 비율을 충족하도록 유도해 고용 성차별을 해소하는 제도다. 올해 대상 기업은 총 2,486곳인데, 이들 기업의 여성 노동자 비율은 37.69%, 여성 관리자는 20.92%에 그쳤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 회사의 정규직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취업준비생이 된 나는, 얼마 전 한 취업 정보 사이트에서 주최하는 ‘멘토와의 만남’ 행사를 갔다. 나는 그곳에서 모 공기업에 다니는 남성 멘토의 강의를 들었다. 우리 조의 참가자는 모두 여성이었는데 멘토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여기 오신 분 모두 여성분이신데, 다들 잘 오셨다고. 그는 자신이 사기업에 다닐 때는 입사 동기 100명 중 단 4명만이 여자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소위 ‘남초’로 유명한 식품 기업의 영업직이었다 해도 좀 너무한 비율이었다.
그는 공기업이 나라의 정책 때문에라도 성비 균형을 맞추어 뽑는 편이니, 공기업이 여자 지원자들에게 더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 우리를 격려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더 맥이 빠졌다. 그의 말대로 ‘공기업이 여자에게 유리하다’는 것도 반만 사실이었다. ‘적극적 고용개선조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정부가 정한 여성고용 기준인 동종업계 평균 대비 70%에 못 미치는 사업장이 아직도 48%(1,205곳)인데, 이 중 공공기관이 148곳(43.5%), 지방공사·공단이 96곳(63.6%)이다.
다시 <파스타>로 돌아온다. 10년 전에는 로맨스에 설레하느라 보지 못했던 서유경의 갑갑함이 눈에 들어온다. 서유경은 직장에서 모든 여성 연대가 단절된 채로 남성 연대만이 공고한 냉혹한 주방을 견딘다. ‘츤데레’라는 말로 비호되는 상사이자 애인의 폭언과 무시도 견딘다. <파스타>를 정주행하지 못한 이유는 숨이 막혀서다. 2020년의 현실은 2010년에 방영된 드라마 속 세상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는 변화하고 있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단오처럼 만화 속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변화시키려 하고, <퐁당퐁당 LOVE>의 단비처럼 ‘평생 도망만 치고 살 수는 없다’며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로 돌아온다. 그런데 고등학생인 단오와 단비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이들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을 도울, ‘평등한 일터’가 그들이 꿈꾸는 미래에 있을까?
나는 앞으로의 드라마에서는 그런 평등한 일터를 보고 싶다. 이미 변화한 한국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들이 지속 가능하게 일할 수 있는 곳. ‘여성이라는 한계’를 딛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는 일터. 현실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현실 그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 이야기꾼들의 일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