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소설] 나얼의 "바람 기억"

아픈 기억이 머문 자리마다 바람이 분다...

by 조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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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기억

“여보세요? 아, 네네! 그럼 제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임 대리! 무슨 일이야?"

“네, 대원에서 아까 보낸 파일이 이상 있다고 확인 좀 부탁한다고 하는 데요?"

"아 그래? 그럼 지금 사무실 가봐야 되는 건가?"

“네, 어쩔 수 없네요."

“확인하고 이상 없으면 다시 여기로 복귀 하고!"

“넵!"


다행이었다. 도현이가 회식자리를 싫어하는 나를 위해 적당한 시간에 전화를 걸어 줬다. 그렇다. 나는 회사 회식자리를 누구보다 싫어한다. 조직 내 팀워크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게 팀 회식이지만, 이렇게 반 강제적인 회식 참여는 정말 몸서리치게 싫다. 특히나, 언제나 메뉴는 삼겹살. 도대체 왜 회식자리엔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오늘 괴로운 회식자리가 있다고 메신저로 무심코 얘기를 했는데, 도현이가 먼저 전화를 걸어 주겠다고 했다. 다행히, 도현이의 전화로 술에 취한 팀장님을 따돌리고, 회식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바람이 분다. 유흥가 골목을 돌아 나오는 길, 간만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 기분이 좋아졌다. 이 기분 좋은 바람에 쾌쾌한 고기 냄새가 모두 날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그냥 가면 어떡하냐?"


도현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도현이가 설마 나를 마중 나온 건가? 나는 반갑고 기쁜 마음에 작은 비명을 질렀다. 도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슬며시 웃는다. 나는 저렇게 웃는 도현이의 얼굴을 참 좋아한다. 하지만, 요즘 도현이는 저 웃음을 잘 짓지 못한다. 도현이는 요즘 그렇게 많다는 88만 원 세대, 청년 백수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2년, 나는 운 좋게 회사원이 되었지만 도현이는 그러질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도현이를 좋아한다. 물론, 도현이는 누구보다 말이 잘 통하고 서로를 잘 아는 대학 친구였다. 그래서 동기들에게 우리 두 사람은 공공연하게 사귀는 캠퍼스 커플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의 사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친구다. 아니, 도현이에게 나는 항상 친구다. 그랬다. 나에게 도현이는 친구 이상의 존재였지만, 도현이는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친한 친구로 규정했다. 특히,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두 사람의 입장이 달라진 이후로 도현이는 더욱 더 분명하게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친구라고 못 박았다.


“깜짝 놀랐잖아! 설마 나 만나러 온 거야?"

“실은 이 근처에 약속이 있었어."

"아……그래서 아까 전화해주겠다고 한 거구나?"


그랬다. 사실, 아까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았었다.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회식자리에서 나를 구해주고, 마중까지 나와 있는 도현이를 보고 살짝 가슴이 뛸 정도로 설레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야 모든 오해가 풀렸다. 도현이는 이 근처에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럴만해서 그랬을 다. 금세 김이 빠진 내 표정을 보았는지 도현이는 애써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술도 깰 겸 어디 가서 바람 좀 쐬자!"


그리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간다. 나는 그런 도현의 뒤통수를 바라본다. 도현이는 뒤통수 마저 참 잘생겼단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내가 또 주책이란 생각을 한다. 이젠 지칠 때도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도현이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현이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보고 내 친한 여자친구는 도현이를 나쁜 남자라 불렀다. 언제나 희망고문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다. 도현이는 내게 희망고문을 한 적이 없다. 도현이는 언제나 분명하게 우리의 관계가 친구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내가 도현이 곁에 머물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정말 진심으로 도현이가 내 거짓말을 그저 모른 체 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술 많이 마셨어?"

“응! 조금……”

“이거 마셔."


낮에 거래처에 갔다가 받았던 비타민 음료를 가방에서 꺼내 도현이에게 주었다. 도현이는 단숨에 음료를 마시고 하늘을 본다. 서울의 밤 하늘엔 별이 없는 데도 도현이는 별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재채기가 나왔다. 9월의 낮은 아직 제법 뜨겁지만, 9월의 밤은 제법 쌀쌀했다. 낮에 입었던 얇은 블라우스는 9월의 밤을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추워? 내가 안아 줄까?"


예상치 못했던 도현이의 말에 나는 잠시 얼어 붙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었다. 안아달라고 해야 하는 건가? 미쳤어 라고 해야 하는 건가? 어쩔 줄 몰라하는 내맘을 알았는지 도현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도현이의 웃음소리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려졌다. 도현이는 그냥 농담을 한 것일 뿐이었다. 나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창피하기도 하고, 그렇게 나를 놀리는 도현이가 얄밉고 야속해서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오기가 생긴다. 술 김에 무슨 짓을 못하랴 생각도 한다. 나는 용기를 내어 도현이의 손을 덥석 잡는다. 그리고 그 손을 끌어다 깍지를 껴 본다. 순간, 도현이는 멈칫했지만, 매정하게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나는 그제야 맘을 놓고, 도현이의 따뜻한 손을 꼭 잡아 본다.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도현이의 손을 잡고 있으려니 내 얼굴도 달아 오다. 그렇게 도현이와 나는 뜨거운 손을 잡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미안해. 근데, 넌 내게 가족 같은 사람이야. 여동생 같고, 누나 같은…….”


도대체 도현이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도현이는 지금 이 순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고 있었다. 순간, 깨달았다. 도현이가 내게 얼마나 잔인한 말을 했는지를. 그랬다. 도현이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도현이를 좋아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최선을 다해 도현이에게 거짓말을 했는지. 그리고 지금 도현이는 이제 그만 하라고, 이제 그만 자기를 포기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설픈 연인들이 이별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길. 9월의 바람은 드라마틱하게 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설픈 연인에게 드라마와 같은 이별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하염없이 우는 나를 두고 갈 수 없던 도현이는 내가 울음을 그칠 때지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겨우 울음을 그친 나를 도현이가 데리고 지하철 역에 데리고 갔을 때, 지하철 막차는 이미 끊긴 후였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으러 지하철 역을 다시 올라온 도현이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 보다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드라마는 드라마 일뿐, 방금 이별을 하기로 한 우리 두 사람은 지하철을 놓치고 서로 택시를 잡기 위해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이다. 물론, 지하철 막차가 막 끊긴 유흥가 주변에서 택시를 잡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택시를 잡기 위해 4차선 대로 변에 선 우리 두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택시가 아니라 9월의 새벽 밤바람뿐이었다. 바람에 추워하는 내 모습을 본 도현이가 내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


“바람 많이 분다. 추우니까 내 등 뒤에 서 있어."


대로 변에서 불어 오는 싸늘한 밤 바람을 맞으며, 택시를 잡는 도현이의 등 뒤에 바짝 기대어 나는 서 있다. 따뜻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슴을 쭉 펴며 바람을 막아 주는 도현이의 등에선 도현이의 땀냄새도 났다. 하지만, 그 땀냄새는 그 어떤 향수 보다 향기로웠다. 이렇게 평생 도현이의 등 뒤에 서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일단, 잠실이요."


택시에 타자 마자 도현이가 택시기사에게 한 말이다. 도현이는 나를 집에 데려다 주고 가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누가 봐도 지금의 우리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친구 관계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헤어지기로 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눈물이 핑 돌려고 할 때, 도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나는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괜히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도현이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건넨다.


“미안한데, 내가 택시비가 없어서……”


순간,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그냥 웃어 버렸다. 도현이 자신도 어이가 없었는지 어색하게 웃는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가슴 아픈 이별을 하게 된 그날, 우리는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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