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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언니 Feb 22. 2023

음대생에 대한 편견

 나는 사실 중 2까지 음대에 진학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해본 적인 없는 아이였다. 엄마는 산만한 어린이였던 내가 악기를 하면 집중력을 키울 수 있다는 글을 읽고 5살 때부터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나는 동네 선생님들에게 피아노를 중 1까지 배웠지만 피아노는 늘 나에게 장난감이나 친구, 혹은 하기 싫은 숙제같은 존재였을 뿐 '피아니스트'가 되야겠다는 꿈을 키운 적은 없었다.


 중 1 겨울방학 때 친구와 과학고, 외고 입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학원을 처음 다녀본 거였는데, 학원 선생님이 참 잘 가르치셨다. 나는 수학과 과학, 그리고 영어를 학원에서 집중적으로 배우는 것이 재밌었다. 친구와 가끔 떡볶이나 초코 우유를 사먹는 것도 즐거웠다. 몇 개월 다닌 후, 학원에서 시험을 봤다. 영어 수학을 봤는데, 과학고 외고 입시반답게 문제가 엄청 어려웠다. 수학 최고점수가 50점 정도라고 했다. '어쩌지, 나는 20점도 안 나오면' 하고 걱정을 했다.


 시험 결과가 나오고 각자 자신이 풀었던 시험지를 받았다. 놀랍게도 내가 수학 50점의 주인공이었다. 학원 원장선생님은 엄마에게 '이 학생은 과학고에 진학하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해서 엄마의 자부심을 한껏 올려주었다.


 그러나 나는 정작 과학고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중 2 겨울방학 티비에서 성악가 김영미 선생님의 오페라 아리아 한 자락을 들었다. <라트라비아타(춘희)>에 나오는 유명한 '축배의 노래'였다. 나는 지금도 김영미 선생님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포도주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반한 나는 엄마에게 '나 피아노 전공할래'라고 말해버렸다.


 화학을 전공한 엄마는 1958년에 대학을 입학했다. 졸업 후에도 화학과 출신 여자는 고등학교 선생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한국에 기업이 많지 않았다. 엄마는 흔쾌히 말했다. "그래, 화학 전공해도 학교 선생 말고는 할 게 없더라. 너는 음악 전공해서 평생 성당에서 음악 봉사하며 행복하게 살아"


나는 갑자기 예고 입시생이 되었고, 운이 좋아 서울예고를 붙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설렁설렁 피아노를 치던 나에게 서울예고의 학생 수준이나 커리큘럼은 버거웠다. 게다가 피아노를 전공해보니 나는 확실히 무대 체질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범생일뿐이었다. 그래서 대학은 실기보다 공부 비중이 높은 '음악사'를 전공하는 이론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나는 꿈이 많았다. 도서관에 있는 책을 원없이 읽고 싶었다. 내성적인 나의 모습을 바꿀 수 있도록 연극 동아리도 하고 싶었다. 음대생들은 실기 연습에 바빠 중앙 동아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는 용감하게 연극 동아리인 '탈방'에 문을 두드렸다. 그 곳에서 나는 여러 전공을 하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1학년 봄이었다. 한 친구가 원서로 '지구과학' 책을 들고 동아리방에 들어왔다. 행성들이 모두 컬러 사진으로 나온 멋진 책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지구과학' 시간을 좋아했다. 나는 내가 좋아한 과목을 컬러 사진이 도배되어 있는 원서로 공부하는 친구가 부러웠다.

" 우와, 너 이 책으로 배우는 거야?"

친구는 뜨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예고에서 이런 거 안 배웠어?"


나는 예상치 못한 친구의 반응에 놀랐다. 일반고(혹은 특목고)에서 진학한 친구들은 같은 '서울대'라도 '음대'는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편견은 위의 간단한 대화처럼 무시하는 톤으로 발현되었다. 혹은 같이 세미나를 하거나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좀 어려운 개념이 나오면 음대생인 나를 배려한답시고 '얘가 이 개념을 알려나'하는 표정으로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해준다.


나는 두 경우 모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음대생이라고 무조건 공부를 못할 거라고 여기는 그들의 편견에 솔직히 화가 났다. 나는 운좋게 97 불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서울대 왠만한 과는 교차지원을 해도 모두 들어갈 정도의 성적이었다. 나는 나만 그렇게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음대에도 미대에도 실기를 병행하면서도 공부를 잘 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당시 어렸고, 나에게 편견을 갖고 대하는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회에 나오니 음악 전공자에 대한 편견은 더욱 심했다. 미국이나 유럽은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남다른 재능이 있다'며 부러워한다. 그러나 입시제도가 치열한 한국에서 음대는 '공부 못하는 애들이 대학가려고 선택하는 곳'이라는 편견이 강하다. 어려서부터 하루에 서너시간씩 악기 연주에 매달리며 공부도 악착같이 쫓아가는 음대생들도 많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일반 여고에 음악 선생으로 취직했다. 당시 나는 석사 논문을 쓰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늦게까지 교무실에 남아 논문을 썼다. 나는 서양음악사 전공이므로 당연히 원서를 읽으며 자료를 모을 수 밖에 없다. 다른 선생님들은 내가 원서를 읽고 있으면 종종 놀라며 말했다.

"음악 선생님이 왜 영어책을 읽어요?"


영어책은 영어 선생님만 읽으란 법이 있는가. 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하루는 학교에 대학교 성악과 학생들이 연주를 하러 왔다. 대여섯명의 성악과 학생들은 여고생들 앞에서 연주를 한 후,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어찌나 큰 목소리로 떠드는지 선생님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한 선생님이 나를 위로해준답시고 이렇게 말했다.

"음악하는 사람이 음악만 잘하면 됐지 뭐."

그러면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좀 기가 막혔다. 사실 예술하는 사람들은 예의가 바른 편이다. 어려서부터 도제 제도로 스승에게 엄격한 레슨을 받으므로 예의에 어긋나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또한 선후배나 친구와 평생 무대에서 함께 하므로 함부로 무례하게 행동하다가는 금방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사실 그렇게 시끄러운 사람들은 어느 집단이나 있다. 그런데도 예술하는 사람들이 떠들면 사람들은 '역시 예술가들은 이상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나는 내가 공부를 소싯적에 좀 했다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30대 중반 어느날 경단녀로 몇년을 살며 내 미래에 불안해할 때, 나는 가까운 친구들의 단톡방에서 '나 수능 점수 높았다'라고 고백을 해버렸다. 대학시절부터 계속 '음대생은 공부 못해'라는 무시와 편견이 서러웠고, 지금은 집에서 애만 키우는 내 모습이 너무 슬퍼서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런 이상한 고백을 하고 나는 몇번이나 이불킥을 하였다. 친구들은 다행히 나를 위로해주고 이해해 주었다.


나는 이제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웠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인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강연을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누가 나를 꼭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 안에 신이 주신 재능을 감사히 여기고 더욱 갈고 닦아 많은 사람들이 음악과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대학 시절부터 약 20년의 세월동안 '음악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참 불편하고 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람들은 피아니스트의 아름다운 연주에 열광하지만, 음악가에 대한 무시와 편견을 동시에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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