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한 질문을 받으면 숨 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패닉 상태에 빠지곤 했다. 그것은 바로 "너희 아빠는 뭐 하시는 분이니?"라는 질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한 물음을 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 처음 만난 사람들(특히 어릴 적 나의 기준에서 어른들)은 대체로 나의 '이름' 다음으로 '아버지의 직업'을 궁금해하곤 했다. 어렸을 때의 나, 그러니까 초등학교 정도 되는 나이의 나는 그 질문의 크기나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워 그러한 질문이 마냥 불편하기만 했다. 이 사람은 왜 우리 아빠 직업을 물어보는 걸까?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묘하게도 그 질문이 나의 입장을 거북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상대의 질문에 내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할 수 없는 것, 망설이며 상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고, 그들을 바라보던 나의 기대에 찬 눈을 아래로 내리 깔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우리 아빠는 음..." 내가 대답을 망설일수록 어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더욱 빤히 보거나, 이미 다 알겠다는 듯 나에게서 눈길을 거두곤 했다.
의심과 경계를 전제로 일방통행하는 어른들의 배려 없는 질문은 어린 나의 목을 옥죄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심문이나 가정환경조사에 가까웠고, 기다림과 배려의 의지가 없는 무언의 다그침일 뿐이었다. 어린 나의 눈에 비친 어른들이란 그저 아버지의 직업을 너무 자주 혹은 쉽게 물어보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아버지가 무얼 하시는 분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 괴상하고 고약한 존재였다. 그들은 마치 이 사회에 가정의 형태는 하나밖에 없으며, 나 역시 보통의 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마치 '얘야, 그렇지만 너도 아버지가 있을 거 아니니. 그러니까 얼른 대답해보렴. 너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 분인지 말이다.'라는 강요 같았다. 이런 암담한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직업을 말하기 싫었고, 말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무례하고 무리한 상황은 나를 점점 더 위축되게 만들었고 그럴수록 내 입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들은 타인에 대해 알아갈 때 그 사람 자체만으로 평가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직업(으로 대표되는 가정환경)을 중요하게 참고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누군가는 그의 아버지의 직업, 경제력을 등에 업고 그것들과 동일선상에서 평가되곤 한다. 어떤 사람의 세평이 좋을 때, 마침 그의 부모의 직업이 소위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이거나 유명인이며 경제력 역시 남부러울 것 없는 풍족한 집안이라면, 그에 대한 평판은 더더욱 긍정적으로 바뀌곤 한다. 어떤 대상을 평가할 때, 그 대상의 어느 한 측면의 특질이 다른 특질들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후광효과'는 소위 그 사람이 잘생겼거나 예쁜 외모를 가진 것만큼이나 아버지의 직업으로 대표되는 것들에서 결정되곤 한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 와는 관계없이 결정된다. 말 없음이라는 동일한 행위에도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높은 아버지의 자녀인 A의 침묵은 예의 바르고 듬직하다고 평가되며, 편모/편부 가정이거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낮은 아버지의 자녀인 B의 침묵은 어두움, 우울함, 불안함 등 부정적인 성격으로 매우 쉽게 고려된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흔하게 보고 듣는 질문이 바로 "니 아버지 뭐하시노?"가 아니던가.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이것은 소위 사고를 쳐서 교무실에 끌려가는 아이들(혹은 학생들)만 듣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도 않고 학교에서는 매우 조용한 아이라 하더라도 그 아이의 아버지의 직업은 언제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며 또는 그 아이를 평가할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하물며 그 반대는 오죽할까.
이러한 조악한 질문은 자매품도 있다. 바로 "우리 아버지가 누군 줄 알아?"다. 주로 매체를 통해서는 자주 접하게 되는 이러한 경우는 (추측컨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무조건적이며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보내는 상황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그들은 이 세계에 대한 의심이라고는 없다. 그들에게 세계란 그저 자신의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들이 목도한 적 없는 아버지의 담장 밖 세상은 그 역시 경험해보지 못한 아버지의 또 다른 세계일 뿐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성공한 아버지일수록 그가 창조한 세계에 대한 자녀들의 절대적 믿음은 세계를 향한 불신과 정비례한다. 그럴수록 그들에게는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아버지의 이름을 사람들이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버지의 이름 안에 편입되는, 즉 아버지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일시적으로 공유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상대방이 우리 아빠의 직업에 대해 알아야만 하는 이유"이니 말이다.
어릴 적 나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 것이 무척이나 싫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아버지의 부재,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아버지의 이렇다 할 직업 없음은 사회가 구획해놓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나를 언제나 비정상, 소수, 비주류에 속한,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아이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항상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물었지만 그건 진짜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세계에 대한 굳건한 신뢰 속에서 가벼운 호기심으로 내가 놓여있는 세계의 불우함을 확인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재확인함으로써 또다시 안도감과 평온함을 느끼고자 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 행동에는 사실 모든 존재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인정과 삶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려는 시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아버지 직업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지표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세계의 불확정성, 불확실성을 가리고 지금의 세계가 온전히 유지되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질문이 끊임없이 아버지의 직업으로 회귀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 정체성, 근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안함의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그들 역시 불가해한 타자로부터 느껴지는 공포와 위기를 지금 당장 확인 가능한 것들로 채워 넣은 무력하기만 한 보통의 존재였을 뿐이다. 어떤 순간이든 정직하게 놓여있는 사과의 보이지 않은 부분을 헤아리는 일이란 쉽지 않다. 세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생각과 배려를 선행하는 것 역시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이 견고하고 불가해하며 무례한 세계를 항상 침착하게 그러나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희망의 부재 속에서도 내게 주어진 시시포스의 형벌을 능동적으로 의식하고 행복하게 감내해야 한다. 까뮈의 말처럼 그것이야말로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 말이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