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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 사는 로젠 Dec 06. 2023

05_노 바이러스?

  바이러스가 없다고?ㅣ 

    

   전날 분식집에서 열띤 대화를 나눈 후부터, 멀더와 나는 수업이 끝나면 간식을 먹고 지하철 역까지 함께 걸어가는 일종의 루틴이 생겼다. 그는 2호선 시청역에서 먼저 내렸는데, 내리는 역의 문이 열릴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멀더는 영어로 말하다가 아는 단어는 한국어로 말했고, 나는 한국말로 말하다가 콩글리쉬를 구사하다 때로는 사전을 찾기도 했다. '염상섭' 이후로 그다지 이 미국 청년의 한국 발음은 듣지 못했다. 당시 내 손에는 항상 영한(english_korean) 소사전이 들려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영어 단어를_내가 모르는 단어라고 생각하면 사전을 달라고 해서 찾아서 나에게 보여 주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 낯선 이방인과 나는 조금 더 분명하게 의사 소통하려고 매순간 노력했다. 속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런 태도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다. 단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가 달라졌을 뿐. 


   나는 멀더와의 한국어 수업 때 필요이상 많이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이를 테면, 지하철 문에 ‘기대지 마시오’라고 스티커가 붙어 있는데, '기대다'는 영어로 'lean on' '마시오'는 'do not' 정도로 쉬웠다. 반면에 한국어로는 '기대다'에서 '~지 말다'의 문형, '말다의 끝없는 활용', 선어말 어미 '–시'에 명령형 '마세요'와 '마시오'로 끝나야 하는 경우의 차이까지 설명할 수 있는 말이다. 저 짧은 한 문장이. 더구나 한국말로 '기대지 마 좋을 말로 할 때' 왠지 그런 뉘앙스까지 이야기하게 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후에 제이슨과 경상도 지방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이'라는 사투리 경고문을 보고 웃자 웃다가 그 글자를 가리키니 제이슨은 아직 읽지 못하였다. ‘마세이~’를 알려주고 싶은 충동을 참으려 애쓴 기억이 난다.  


                            

   그날도 지하철을 같이 탔다. 건너편 칸에서 취객 아저씨가 통로 중간에 서서 뭐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화가 엄청나셨다. 들리는 말이 미국 욕하는 내용이다. 미국 아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일 때였다. 나는 그때 멀더가 그 아저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저씨가 ‘이라크’ 나 ‘부시’라고 발음해도 가까이 가서 귀 기울여 듣지 않는 한 영어로 들리지 않는다. 그가 나더러 일주일 동안 뭐 했냐고 물어보면, 무슨 영화를 봤다 하니, 영화는 아는 단어고 제목은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른다. 내가 제목은 영어로 '타이틀'인데... 하면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천천히 타. 이. 틀 해봐야 소용없다. 결국 내가 철자를 써줬다. 그랬더니 오! 타이를(title)! 이랬다. 영국사람은 타이틀 해도 알아들을 것 같은데 미국 영어는 정말로 발음을 최대한 굴리는 억양이 들어가야 그나마 영어처럼 들린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아흔아홉(99) 칸 가진 넘이 나머지 한 칸을 더 가지려고 엉!’ (조선시대 집 100칸은 왕만이 가질 수 있었다) ‘와 아저씨 비유가 찰떡이시네요. 저도 아저씨와 같은 생각이에요.’ 내가 이렇게 방심하고 있었는데, 아저씨 목소리가 가까이 들려서 보니 어느새 멀더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국인이지만 멀더는 갈색머리인데 너무 화가 나셔서 노랑머리로 보였나 보다. 멀더에게 대놓고 직접 뭐라고 할 태세는 아니었지만 술기운이 오른 아저씨는 나의 미국 학생을 똑바로 쳐다보고 계셨다. 내가 불안해졌다. 우리는 지하철 중간쯤에 서있었는데 내가 그를 끌어당겨서 노약자석 쪽으로 이동했다. 아저씨는 우리를 바로 따라오지는 않았지만, 멀더의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아저씨를 쳐다보지 않고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가 뭐라고 하는지...음... '아저씨는 미국을 싫어하는 것 같아'라고 내가 말했더니, 그때 미국 사람 멀더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지하철 선반에 대고 말했다. “저는 미국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체코 사람입니다.”

   

   어찌나 발음이 정확했는지 다가오던 아저씨도 알아들으셨다. “ 아 그래? ”, “ 쏘리~” 그러시면서 마침 열린 문으로 내리셨다. 아니 그냥 가시네...그나저나 네가 갑자기 체코 사람이라고? 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려 손으로 코를 잡으니 컹- 코에서 마치 방귀 뀌는 소리 같은 것이 나왔다. 아니 처음 촌장 님하고 얘기할 때, 미국 사람이네 뉴요커네 그렇게 자부심 넣은 영어로 쏼라쏼라하던데 갑자기 조상님 국적을 내세우다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바이러스 감염자로 병원에 격리된 중학교만 다닌 강두(송강호)가 코쟁이 의사들의 영어 대화 중에 'No Virus'를 알아듣는다. 노 바이러스? 바이러스가 없다고?... 생존의 위협을 받는 순간에는 가장 중요한 말은 잘 들리는 법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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