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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 사는 로젠 Jan 23. 2024

09_카라바조를 보고 오세요.

뽀로로 성당

   이날은 혜화동에서 만났다. 멀더는 혜화동을 좋아했다. 창경궁 가는 길도 좋아했다. 그날은 혜화역 어디쯤 카페 구석진 곳에서 한국어 공부를 했다. 멀더는 2006년 하반기가 되자 매주 100 단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공부하는 방식으로 봐서는) 한번 만났을 때 단어 100개를  새로 익히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 하니,  그는 할 수 있단다. 그래서 내가 100 단어를 익히기 위한 100 문장을 준비해 갔다. 한 시간 반 후에 멀더가 먼저 쉬자고 하더니, (50 단어 했다) 2 시간에 100 단어는 힘들겠다고 한다. (내가 힘들다고 했지) 숙제로 하는 것이 좋겠단다. (동서고금 학생들은 숙제로 한단다) 잠시 쉬는 타임을 가지면  다시 공부로 돌아가기 힘들다. 교실에서도 그런데 카페에서 커피 마시면서 하는 편한 수업은 오죽하랴. 그저 정기적으로 만나는 우리가 대단했다고 할 밖에.

   나는 그해 겨울에 해외 여행 계획이 있었다. 내가 스페인에 갔다가 이탈리아를 통해 나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공부하던 단어 공책 위에 로마 지도를 펼쳤다. 지금이라면 본인 휴대폰에 여행할 장소만 저장해 두면 되는데, 예전에는 여행 가이드북이 필수였다. 숙소와 교통, 가 볼 장소 등을 사전에 리스트를 만들고 가이드북에 일일이 표시해 둬야 했다. 이미 유럽을 다녀온 사람에게 책을 빌려달라 했더니 벽돌책 한 권을 '그냥 가지라'라고 줬다. 두꺼워서 쓸모없었나 보다. 어쩔 수 없이 스페인과 이탈리아 부분만을 분책(?)해서 가져갔다. 로마 시내를 거닐다 보니 많은 여행객들이 그 두꺼운 벽돌책을 들고 책에 펼쳐진 부분 한번 보고, 거리를 두리번거리다 또 책을 보고 하면서 걸어 다녔다. 요즘은 휴대폰을 봤다가 길거리를 봤다가 하니, 어차피 고개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건 마찬가지다. 훗.

     멀더는 로마지도를 보더니 '라바조를 보고 오세요'라고 했다. 라바조? 이 발음도 오묘한 이는 누구실까? 이 화가의 이름을 멀더에게서 그날 처음 들었다. 2006년 11월,  내 가까운 사람 중에 스페인을 다녀온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유럽 여행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묶은 패키지 투어가 인기였다. 이탈리아 로마에 다녀온 이들은 조금 있었는데, 보통은 영화 <로마의 휴일> 코스 투어를 했다. (오드리 헵번 코스라고 해야 할지) 나는 로마에서 하루 반 정도의 시간 밖에 없으니 그냥 시간 되는 만큼만 보기로 하고, 특별히 나는 판테온과 나보나 광장을 보기로 하고 (이유는 훗날에) 멀더가 추천한 카라바조 그림이 있는 성당을 넣었다. 세상 아는 알파벳 발음이 미국식 영어밖에 없어서 카, 까, 포, 뽀 등의 그 동네 철자가 매우 헷갈렸다.  

    여행책의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 주었다. 멀더가 표시한 카라바조의 그림이 있는 성당이 뽀뽈로 광장(Plazza dei Popolo) 지역인데 나는 쉽게 뽀로로라고 기억했다. 길치는 아니라서 지도만 있으면 된다 하고. 그렇게 이름을 듣고 나니 여행책의 한 구석에 소개돼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있는 것이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구나. 막상 현지에 가니 여행 안내서가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았다. 지도를 들고 유명한 곳 한 군데를 간 후에 사람들이 이동하는 데로 따라가다 보면 그 다음 유명한 장소가 나왔다. 나는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을 보고 판테온(Pantheon)을 향했다. 가는 길에 조각상 부조를 보았다. 부조가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벽 안을 둥글게 파고 조각상을 세워두었다. 사진을 찍다 보니 조각상 이름이 카라바조(Caravaggio)였다. 한번 들어둔 단어니 바로 알아보았다. 아. 이 사람이야? 이 길이었어? 하면서 안내 방향으로 들어갔다. 길 안쪽으로 검소해 보이는 작은 성당이 있었다. 


   내가 이탈리아를 가기 전에 이미 이탈리아를 가 봤던 외국 사람이 옆에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이었던가. 카라바조인지 까라바조인지 발음이 무슨 대수일까. 정말 엄청난 그림이 거기 있었다. 성당 안쪽으로 들어가 올려다보니 큰 그림이 벽처럼 있었는데 어둑어둑해서 잘 안보였다. 그림 앞에 동전을 넣으라는 문구가 있다... 동전 하나가 들어가자 조명이 탁 켜지고...... 와.....(말은 무의미) 빛이 들어오자 어둠 속에서 갑자기 살아있는 사람들이 나타나 잠시 거기 멈춰있는 듯했다...... 장엄(magnificence)이 이탈리아 말로 무엇일까. 어떻게 이런 그림이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니!... 잠시 후에 조명이 꺼진다. 어 안돼 안돼... 조명이 꺼지면 다시 동전을 넣는다. 나는 그림에 깊이 빠져들어서 계속 동전을 다시 넣었다. 그게 그림을 보호하는 차원인지 성당 수입 차원인지 수는 없었으나 조명이 꺼졌다 다시 켜지는 것이 그림의 느낌을 극대화시킬 뿐만 아니라, 처음 느낀 숭고함이 계속 유지된다. 함께 성당에 들어온 서양인 부부가 동전을 계속 넣는 나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아깝지 않아요.) 그림은 정면 좌우 석 점이 있었다. 동전이 떨어지고 있어 정신을 차리고 조명이 꺼지기 전에 그림 두 점을 찍을 수 있었다. 사진 찍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땡큐 멀더.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chisea s.luigi dei francesi

                                                                             


      이 글을 정리하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제이슨이 알려준 카라바조 그림이 있는 성당은 Plazza dei Popolo인데 내가 길다가 우연히 찾은 성당은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이다. 우리는 같은 사람의 다른 그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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