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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경 Jan 22. 2019

철학함, 길 잃기

■천경의 철학 엿보기

몇 년 전, 겨울 오후에 근처 산에 갔다.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흡사 구릉지처럼 낮은 산. 별일 없는 날이면 아침에 산에 다녀오곤 했으나 뭉그적거리다가 시간을 놓쳤다. 오후가 되면서 눈발이 날리더니 어느새 탐스러운 눈송이가 펄펄 내린다. 거실 소파에서 창밖을 보다가 일어났다. 산에 가자!    


오후 3시. 발자국이 없는 등산로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산길을 오른다. 막역한 친구처럼 산은 푸근하게 두 팔을 벌려 환영한다. 초입에서 안면 있는 사람을 만났다. 


“오늘은 늦으셨네! 눈 오는데 이 시간에 혼자 가요?”    


 미소를 짓고 목례를 한 후 나는 이 겨울에 내리는 첫눈을 평생 처음 만난 듯이 바라본다. 하늘은 희붐하게 가까이 내려와 있고 산 전체가 눈으로 덮여서 나무들이 눈꽃이 되었다. 나의 눈은 이 눈꽃을 보려고 여태 살아있었나 보다! 그런 날이 있다. 산다는 것이 무수한 슬픔과의 조우라 하더라도 그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싶은 날. 그 날이 그런 날이었나. 세상을 향해 나는 웃었다. 나 방금 어린아이가 되었나. 니체는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니체의 위 문장이 그때의 기분에 어울릴듯하다. 이곳 산은 해발 100미터가량의 둔덕 같은 산이다. 1시간이면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그러나 산허리를 따라 돌아서 가게 되면 1시간 30분 이상 소요된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산둘레를 따라 약수터가 있는 지점을 택했다.     


한참 걷고 있는데 저쪽 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온다. 더벅머리, 검고 험상궂은 얼굴에 등산복을 챙겨 입지 않은 남자, 누추하고 지저분한 청바지 차림이다. 느릿느릿 여기저기 주시하며 걸어서 내 쪽으로 오는 이 남자. 처음 보는 얼굴이다. 몸이 오싹해졌다. 겁이 많은 내가 이 늦은 시간 겨울산에 온 것부터가 문제다. 지갑을 꺼내서 그에게 줄까?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으나, 내 몸은 나보다 먼저 아래쪽 샛길로 달음질치고 있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외진 비탈이라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낯선 남자와 딱 마주치는 순간이 두려워서 나도 모르게 선택한 길이다. 뒤에서 누군가 쫒아 오는 기척을 느끼며 정신없이 달아났다. 나무들과 눈송이들이 뒤엉킨 눈길을 뛰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이거 꿈이었으면!    


넘어지면서 미끄러져 내려와 멈춘 순간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옆에서 으흐흐 웃고 있는 사내를 상상하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영화를 많이 본 탓이다. 괜찮아 그 사람은 지금쯤이면 등산로 초입으로 갔을 거야. 으악! 뭔가 내게 돌진한다. 악!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바람이 분다. 바람에 눈송이가 쏟아진 것이다.     


나는 일어나 옷을 털고 긴장을 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쪽으로 호수가 넓게 펼쳐져 있다. 안개 같은 것이 눈이 멈춘 호수 위에 어른거린다. 적막하고 고즈넉하다. 나는 한동안 서 있었다. 눈 덮인 비탈길이 보인다. 길이 있었구나! 샛길을 따라 호수를 끼고 걷자 저만치 앞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다. 정겨운 시골집 지붕 위에도 눈이 하얗다. 농촌마을, 작은 집들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동네가 있었네. 그 청년은 이 동네 사람일까? 청년일까? 무슨 근심에 싸인 중년일까? 무릎이 나온 청바지에 운동화를 끌고 겨울산을 그는 왜 헤맸을까? 그는 슬픔이 있나?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지 나처럼 눈이 좋아서 산속을 헤매는 낭만적인 사람일까? 한데 얼굴이 왜 그늘져 보였을까?      


나는 여행자가 되어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이젠 조금 더 산에서 헤매도 되겠다 싶을 만큼 안전을 확신했다. 놀란 탓인지 몸에 힘이 쭉 빠지고 기운이 없다. 몇 년을 다녀도 몰랐던 길을 발견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마을을 만났다. 거기 아름다운 겨울 호수가 있다. 약수터 쪽으로 평택호가 있었다. 그러나 그 호수가 길게, 산둘레를 빙 둘러서 흐르는 줄은 몰랐다. 가까이에 내려와서 보니 이 겨울 풍경, 눈 내리는 호수와 하늘과 마을과 산은 한 덩어리로 그림이다. 길 잃은 나그네가 되어 정처 없이 이국의 땅을 배회하는 느낌. 더 이상 불안은 없다. 땅거미가 지고 사위가 천천히 어두워진다. 마을로 내려와서 길을 따라 걷는다. 문득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신들처럼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 길 떠나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냐고, 모르는 집의 문을 두드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리스 신들은 사람으로 변장을 하고 인간의 세상에 내려온다. 아름다운 세멜레에게 마음을 빼앗긴 제우스.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으로 내려와 세멜레와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알게 된 아내 헤라 역시 인간으로 변장하고 세멜레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지금 만나는 이가 제우스인지 확인해보라고 한다. 진짜 제우스라면 인간이 아닌, 신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 달라 하라고 시킨다. 세멜레는 헤라의 꼬임에 넘어간다. 결국 천상의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 제우스의 광채에 세멜레는 타 죽는다. 제우스는 밝음과 광채, 번개를 관장하는 신이 아니던가. 제우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세멜레. 젯 더미 속에서 제우스는 세멜레의 태중에 있던 핏덩이를  찾아내 자신의 허벅지에 집어넣은 뒤 열 달을 채운 후 다시 꺼낸다. 이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 신이다. 세멜레는 디오니소스 신의 어머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신의 지위도 체면도 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황소로, 청동 비로 온갖 것으로 변장해서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둥이 제우스를 오늘은 용서하고 싶다. 아내 헤라 입장에서 보면 불륜도 그런 불륜이 없다. 문득 내 안에서 금기와 터부가 엿가락처럼 흐물흐물 녹아버린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신들에게 투사해서, 자신들의 삶을 직면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그들이 삶을 긍정하는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보고 싶지 않은 것, 삶의 비의들, 비루한 절망과 운명의 잔혹함,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받아들인 용기가 그들의 삶을 추동한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 풍습의 우상이나 때 묻은 사유들에서 한참 떨어져 나와 버린 느낌이다. 미아가 된 인간, 무한 아래 홀로 떨어진 인간. 태초의 원시림의 지대로 내던져진 듯한 이 순간, 이 순간이 나의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철학한다는 것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철학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길을 잃기가 아닐까? 길을 찾아 헤매기가 아닐까? 헤매다가 보면 마을이 보이고 강이 보이고 작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그 사람의 방, 창문들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잠시 그의 집에 머물기가 아닐까? 그리고 다시 떠나는 나그네의 삶이 철학하는 삶이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내를 돌아다니며 아테네 시민들의 무지를 일깨워주려고 애쓰다가 목숨을 잃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자신의 무지를 알지만, 아테네 인들은 자신의 무지를 알지 못하며, 한 술 더 떠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로 착각하는 것을 문제로 본다. 그래서 당신이 알고 있는 탁월함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알고 있는 용기란? 정의란? 경건함이라 무엇인가를 묻고 다녔다. 그리하여 이들이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묻고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이들은 스스로가 지혜롭다고 확신하며 잘못된 자부심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묻지 않고 살 경우 거짓 지혜에 대한 망상 속에 살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해서 소크라테스적 무지는 소크라테스적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테네 인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에서는 자신이 아테네 인들보다 낫다고 본다.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대답하다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는 소크라테스는 물론 소크라테스에 의해 코너에 몰린 당사자에게도 기쁜 일이다. 내가 알지 못한다는 자각에 이르는 것이 새로운 시작이요. 출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인은 그 사실을 치욕스럽게 생각했고 이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미움을 샀다.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이 있는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무엇이 있는가? 이 신념의 체계를 흔들어서 무너뜨리고 새로운 헤맴, 새로운 벌판으로 나가는 것은 내가 믿는 앎은 오류이며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하다.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앎을 앎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바로 내가 그렇다. 내가 믿고 있는 가치체계가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의 앎을 자주 의심하려 한다. 그 앎은 한시적으로만 유효하거나 독선이거나 위장, 허세이거나 가짜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짜가 내 안에서 공고해지면 치명적인 무기가 되어 나를 찌르고 세상을 찌를 수 있다.    


 철학한다는 것은 가상을 매번 새로 조형해내는 무한한 유희가 아닐까. 자발적 길 잃기와 새로 배치하기의 반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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