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신작로 옆에 있었다. 도로를 가로질러 조금만 더 가면 개울이 있다. 개울은 도로 아래를 에둘러 오른쪽으로 도로의 교각을 관통하며 굽이쳐 흘렀다. 여름철 비가 오면 개울물은 침략군처럼 우리 집으로 몰려오곤 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크고 좋은 새 집이었으나 몇 차례의 홍수 피해로 조금씩 파괴되고 부식되어 갔다. 집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향집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예기치 않은 순간 나타나는 그림 혹은 슬픔.
내가 맨 처음 그 장면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10살 이전인 것은 확실하다.
어느 날 낮 대문을 열고 나오다가 다리 교각에 밧줄로 묶인 채 매달려 있는 큰 물체를 보았다. 내 시야에 그 물체가 들어온 것은 뽀얀 먼지와 함께 다. 낡은 시내버스가 비포장도로를 덜커덩 덜커덩 돌아 먼지를 일으키면서 철다리 밑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어떤 물체가 묶여 있었고 곧이어 사내가 몽둥이로 물체를 사정없이 ‘그야말로 개 패듯’ 팼다. 개는 어느 순간 축 늘어졌다.
이어 놀라운 장면이 이어졌다. 사내는 개를 불태웠다. 이윽고 털이 다 타고 까맣게 그을린 개를 사내는 풀어냈다. 이후 장면은 기억에 없다. 그 후에도 몇 차례나 더 비슷한 광경을 보았다. 개들이 인간의 보양식이 되는 과정이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우리 가족은 지금도 개고기를 먹지 않지만 공범의식 일까? 인간 종에 대한 잔인함을 알게 된 공포 때문일까? 기억하지 않으려고 꾹꾹 눌러온 그 기억이 추운 겨울 저녁, 불현듯 떠오른다. 한 번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장면.
지금은 폐허가 된 고향 마을을 생각하면, 이끌려 나오는 아련한 풍경들과 개는 함께 출연한다.
멱 감던 개울, 정겨운 친구들, 착한 그 아이, 새까맣게 그을린 아버지 얼굴, 항상 무언가에 화가 나 있던 엄마, 고래고래 나에게 고함치던 엄마의 목소리, 그리고 그 개...
나는 개를 내 밖으로 밀어내려고 사투를 벌였다. 개는 내 밖이 아니라 내 안 어딘가 심층으로 하강한다. 그리고 정신의 아득한 사다리를 따라 지하 갱도 어디쯤에서 내 의식의 빈틈을 비집고 잠깐씩 햇볕을 쬐러 나오려 한다. 꽁꽁 숨겨두고 눌러두었던 개 이야기. 그것은 공포와 충격, 혼돈과 무력감으로 나를 덮치곤 했다.
그러나 작은 마을은 여전히 평화로웠고, 순박한 이웃들이 하루의 삶을 살아내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조용하게 해는 저물고 사람들은 쌀을 씻어 밥을 해서 저녁을 먹고 아침이면 산으로 들로 공장으로 흩어졌다.
그 개는 어디로 갔을까? 개를 공개된 장소에서 때려죽이고 불을 질러 털을 태운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누구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 장면은 마을의 여러 풍경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때려서 죽인 개의 육질이 부드럽고 맛있다는 속설은 나중에 알게 됐다. 그러나 나는 숨겨야 할 범죄의 기록처럼 그 개와 그 남자와 마을 사람 전체와 내가 한 덩어리로 연루된 느낌으로 살아온 것 같다.
그로부터 벌써 40년은 족히 지났다. 이제는 개나 고양이를 함부로 학대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지난해 개를 집어던진 노인이 TV 카메라 앞에서 곤혹을 치르는 장면이 소개되기도 했고 고양이를 학대한 pc방 주인이 질타를 받기도 했다.
불과 몇십 년 전에는 문제시되지 않던 행위들이 이제는 범죄행위가 된 것이다. 이런 사례는 많다.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의 건전성 여부도 불과 몇십 년 사이에 변하고 있다. 예전이라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됐을 부모의 폭력 역시도 이제는 문제가 된다. 학교 교사의 폭력행위도 그렇다. 부부 사이의 폭력도 전에는 가정사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아동 성범죄 역시 예전이라면 ‘귀여워서’ 혹은 ‘술 탓’하면 넘어갔을 사건들이 이제는 중범죄가 되었다. 가정폭력, 아동폭력, 성폭력, 동물학대, 자식 학대, 하물며 음흉한 눈빛도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낡은 윤리와 도덕이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믿고 행하는 도덕과 윤리에 대해 항상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니체는 지금 이런 모양의 도덕과 윤리는 어떻게 구성된 것인지, 이것들의 기원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이 도덕과 이 윤리는 기만적인 이데올로기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비도덕 주의자 니체는 지금 이 도덕과 이 윤리가 아닌 다른 무엇을 모색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배우라고 말한다.
그렇다.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감각해야 한다!
다르게 인식하면 다르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다르게 배우게 된다.
지금과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람들은 그때 공개된 장소, 다리 난관에 개를 묶어, 어린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개를 때려죽이고 털을 불태우는 장면을, 인간이 짐승에게 할 수 있는 행위로 인식했으므로 무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아이였던 나는, 그 같은 인식을 아직 학습하지 않았으므로 무시무시한 공포로 지각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당연시하고 있는 인식이나 윤리도덕을 의심하자. 니체는 지금 이곳의 도덕과 이데올로기는, 도래할 새로운 인류에 의해 다르게 변주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항상 모든 사회에 그리고 모든 개인에게는 선의 위계라는 것이 존재하며, 거기에 따라 개인은 자신의 행위를 규정하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판단한다. 하지만 이러한 척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많은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그 행위들은 단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의 정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의미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모든 행위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현재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인간 지성은 반드시 또 추월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에 회고해 보면 미개하고 야만적인 민족들의 행위와 판단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편협하고 경솔하게 생각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행위와 판단도 그렇게 편협하고 경솔해 보일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107>”
그 개를 생각한다.
무서워서 얼어붙어버렸던 작은 아이. 나를 생각한다.
가여운 개여, 잘 가라. 다시는 이 세상에 환생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