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의 육아일기
이 사랑은/ 이토록 사납고/ 이토록 연약하고/ 이토록 부드럽고/ 이토록
절망한/ 이 사랑은/ 대낮같이 아름답고/ 날씨처럼 나쁜 사랑은, / 날씨가
나쁠 때/ 이토록 진실한 이 사랑은/ 이토록 아름다운 이 사랑은/ 이토록
행복하고/ 이토록 즐겁고/ 이토록 덧없어 - J. 프레베르 <이 사랑> 중
나는 지금 내 아이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 사위는 어둡고 멀리 창 밖으로 점점이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이 보석처럼 박혀있다. 그 보석 같은 빛을 따라 자동차 행렬의 붉은 불빛, 붉은 꽃! 어둠 속 불꽃놀이 광경만은 못하지만 여하튼 아름답다. 그리고 어디선가 스며 들어오는 아카시아 향! 내가 살아있구나! 내 아이가 지금 내 옆에서 잠자고 있구나! 쌔근대는 아이의 숨소리가 이렇게 감미롭고 따뜻했던가? 인생에 대해 감사하다고 하기엔 삶이 버거웠던 내가 지금 새삼스레 뭔가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렇구나! 아이가 벌써 4살이구나!
그랬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어둠 속에 환한 불빛들도, 아련하고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의 이 향기로운 아카시아 향도, 계절의 변화도, 그 무엇도 감지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시간들을 죽여왔던 것이다. 언제 봄이 왔는지 언제 밤이 됐는지 언제 내가 점심을 먹었는지 혹 저녁을 먹기나 했는지 목욕은 언제 했으며 세수는 언제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오래된 빵 덩어리를 어기적 어기적 씹으면서 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허기를 달랬으므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한 것이 틀림없었고 아이 옆에 엎어져 깜빡 졸다보면 아기가 칭얼거리고 밖이 환해진 걸 보면 잠을 잔 것이 확실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앞으로 무얼 할 계획인지, 전에 내 곁에 어떤 친구가 있었는지 지금 차를 타고 나가면 바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행복한 아가씨들이 꽃처럼 어여쁘게 치장을 하고 애인을 기다리고 있는지... 정말이지 외부와는 단절된 세계에서 하루 종일 1년 열두 달을 아이와 씨름하느라고 헉헉거리고 살아왔던 것이다. 게다가 주말 부부였으므로 아이의 육아는 엄마인 나 혼자만의 몫이었다.
그런데 오늘 내 눈앞에 어제와는 다른 세계가, 익숙하지 않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렇구나! 내가 여유를 찾은 것이로구나! 그동안 전쟁 같던 육아의 하루하루를 건너와 이제야 휴! 지친 눈과 마음과 팔다리를 두드리며 느슨해지고 있는 내가, 나를 보고 있다. 정확히 아이가 태어나 3돌 (36개월)이 지나 처음으로 가져보는 ‘틈’을 향한 고적한 휴식이다. 이제 한 숨 돌리게 된 것일까?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경기도 일산의 한구석 ‘나 홀로 아파트’의 창살 없는 감옥에서 생활한 지 햇수로 3년! 이제 아이와 버스를 타고 가까운 마트나 시장에 가는 것이 힘들지 않게 된 것이다. 아이가 종종 ‘엄마 어야 가서 냠냠 사 먹자’고 말하면 신이 나기도 하다. 아이는 이제 스스로 잘 걸어 다니니 전처럼 업고 안고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 밥을 먹고(옆에서 참견을 해야 한다) 대소변을 가리고 말귀를 알아들으니 한시름 놓게 된 것이다. 물론 육아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전쟁’은 강도와 규모와 내용이 달라진 것이다.
조용히 지난 3년을 떠올려본다. 힘들었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어떤 묵중한 아픔 같은 것, 고통스럽던 시간들, 아기에 대한 아무런 상식도 정보도 없이 시작된 마흔세 살 초보 엄마의 육아의 날들!
아파트에는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고 또래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엄마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향이라 사람들에게 선뜻 다가가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기랑 하루 종일 정신없이 전쟁을 치르며 하루를 후딱 보내면서도 실은 너무 외로웠다. 세상에!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외롭다니? 그리고 뼛속을 사무치는 외로움이 두렵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육아나 살림살이는 애당초 잘할 수 없는 유전자를 타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아이는 4살이 되었고 지방에서 근무하는 아빠가 집에 오는 날에는 오랫동안 못 만난 친구를 만나러 갈 엄두도 내기 시작했다. 물론 4살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만만치는 않다. 여전히 힘이 든다. 하지만 어려운 시간을 잘 이겨왔다는 자부심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