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내 겨드랑이 색이 검게 변했어도...
나 머리 단발로 잘라버릴까?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머릴 묶으니 더 볼 품 없네. .
한 밤 중, 언니에게서 카톡이 왔다.
졸린 눈을 게슴츠래 뜨고 답문을 보냈다.
언니. . 난 머리에 잔디가 났어. . .
나의 풀 죽은 답에 이어 언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분명 문자로 보내 온 웃음인데 그 웃음의 소리가 너무도 생생하게 내 귓가에 스쳤다.
ㅍㅎㅎㅎ 나도 알아 잔디. . 그거 뭔지 잘 알아. ㅠ
그래, 아마 아기를 낳아본 경험이 있는 여자라면 굳이 사진으로 확인시키지 않아도 내 얘기를 이해할 것이다.
잔디머리.
이마 한가운데 1.5cm 남짓한 길이의 머리카락이 솟았다.
출산 후 병든 것 마냥 빠지던 머리카락의 빈 자리를 봄 날 새싹 돋듯 매워주는, 어찌 보면 참으로 고마운 잔디머리다.
덕분에 어젠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다른 건 다 숨겼어도 잔디 머리만큼은 영원한 기록으로 남겨졌다.
뭐. . 어디 그 뿐이겠는가.
끈이가 태어난 이후 난 많은 것을 잃었다.
잘록하던 허리 대신 축 처진 뱃살이나 푸석한 피부 등 외모적인 것은 물론이며, 임신에서 비롯된 담석증으로 꼬꾸라지기를 몇 번, 24시간 중 1분의 자유 시간도 없는 생활과 늘 부족하기 만한 수면. 그리고 점 점 더 무거워지는 아들 덕에 휘어가는 허리까지.
물론 아이가 내 배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정도쯤은 다 예상했었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했었지만 조리원에서 처음 샤워하던 날 마주한 시커멓게 변한 겨드랑이 색깔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충격이었다.
그 누구도 내게 출산 후 겨드랑이 색이 바뀐다고 귀띔해준 이는 없었는데. .
이 아이 하나와 맞바꾼 것이 너무 많아. .
출산 후 급격하게 우울함이 밀려왔을 때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하소연했던 말이다.
아직 미혼의 친구들은 내 이야기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이미 출산의 경험이 있는 친구나 언니들은 달랐다.
괜찮아, 차차 좋아지더라.
나도 그랬어. 걱정마.
라며 내게 공감의 위로를 건네주었다.
성당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는 진해진 임신선과 배꼽 색은 6개월쯤부터 목욕할 때마다 살살 밀면 때처럼 벗겨진다고 쿨하게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공통적으로 덧붙여 말하길,
그래도 아기가 한 번 웃어주면 그런 서글픔도 싹 가시지 않아?
그래서 다들 '엄마'인가 보다.
나의 많은 것을 잃었지만 자식이 웃어주는 것 만으로 그 모든 것을 '퉁'칠 수 있는.
그러고 보면 '그 것'들과 맞바꾼 것이 단순히 이 아기 '하나'가 아니라, 이 아기가 주는 매일의 '추억'이 아닌가도 싶다.
언젠가 아기를 재우다 문득 이런 일기를 쓴 적이 있다.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
하루 하루 다를게 없는 일상 속에서 순간 순간 남기고 싶은 장면이 있다.
그런 장면은 짧든 길든 기억 속에 남아있는다. 그걸 우리는 추억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잠깐 동안, 혹은 오랫동안 머리에 맴돌던 그 추억은 묘하게 느낌으로 가슴에 남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다. 저장공간은 한계가 있고, 매 순간 새로운 추억이 차오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남편은 늦는다.
혼자 아기와 설레고도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취침시간.
여느 때처럼 저녁 약을 먹고 졸음이 가물가물하는 우리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잠결에 쭈쭈를 하던 아기가 평소처럼 잠드나 싶더니 갑자기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어둑어둑한 안방, 거실에서 스며오는 희미한 불빛에 아기의 얼굴이 보인다.
귀여운 소리도 낸다.
손도 빨았다가 눈도 깜빡였다가.
잠결에 하는 행동인가 꿈결에 하는 행동인가.
그 모습이 몹시도 예쁘다.
말로는,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내 눈에 카메라가 달려있다면 당장 녹화를 시작하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 장면은 이렇게 내 눈에 잠깐 머물다가 잊힐 텐데..
잊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수시로 생각날 때면 꺼내어보고 싶은 장면이다.
마음으로 아기에게 말했다.
오랫동안 이 모습을 잊지 않게 지금 열심히 널 보고 있다고.
하지만 벌써 아른아른 장면이 흐려진다.
어느 날엔 이 장면은 잔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 순간의 묘한 기분과 느낌은 오래도록 남겠지?
소중한 순간의 대부분은 그런 것 같다.
너무 찰나의 순간으로 지나가버리기에 더 가슴에 추억으로 아로 새겨지는 것 같다.
연애를 했던 때에도, 여행을 갔던 때에도.
일부러 포즈를 취하고 공을 들여 찍은 사진보다는
함께 마주 보며 얘기하다 나누는 눈빛이나 따뜻하게 손잡아주던 온기 같은 것들이 사실은 더 오래 남기고 싶은 순간인데.
그저 느낌으로 남아있다 그마저도 사라지기에
추억은 더 그립고 더 아련하고 또 아름다운가 보다.
아기 덕분에 간만에 감성에 빠져본다.
술 취한 남편의 귀가가 이 감성을 깨지 않길 바라본다.
2015.3.19
저 일기를 썼던 그 날처럼, 아주 찰나의 순간에도 아기는 내게 추억을 선물해주고 있다.
잘록한 허리 대신 멋지게 뒤집기를 성공하는 장면을.
매끈하던 피부 대신 까르르 웃는 싱그러운 목소리를.
여유로운 티타임 대신 내게 안겨 들어오는 그 행복한 허그를.
매 순간 기록하기에도 버거울 만큼 많은 추억을 '그 것'들 대신, 아니 그 보다 더 넘치게 선물해 준다.
그래서 난 오늘도 감사히 울고 웃는다.
비록 내 겨드랑이 색은 검게 변했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