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가 좋다. 중세가 안온하다.
그때 사람들은 태초로부터 비롯된 혼돈과 암흑 속에 있었으나 한편 태초로부터의 순수한 본능으로 빛을 갈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 무한과 무한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를 잃지 않았고, 끝모를 탐욕을 제어할 공동체적인 견제가 작동했다. 아직은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어느 시대든 암흑은 존재한다. 중세가 ‘암흑기’였다면 현대는 개명천지일까? 사람이 ‘계몽’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계몽된 인간들이 만들어온 세상이 중세보다 더 바람직하고 마땅하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5, 60대의 ‘실질적 문맹률’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는 기사가 있었다. 문맹률은 아주 낮은데 ‘실질적’으로 ‘정보 이해와 응용능력’에서는 문맹이라는 것이다. 참 경악스러운 결과였는데 수긍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 사실은 더 참담했다. 중세에는 사람들이 글을 거의 몰랐다. 이 시대에는 당연히 ‘문맹률’이 낮다. 그런데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이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는 필수적인 요소일까? 과연 ‘글’이 우리를 더 지혜롭게 만들어주고 있을까?
혹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경계했던 문자의 폐해가 오히려 우리 세계를 좀먹고 있는 건 아닐까?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착각으로 도리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시비 거는’ 어이없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글을 모르던 이들이 인지상정으로 깨닫고 알아가던 삶의 지혜마저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살면서 잘 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데도 우리가 중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실질적 문맹’의 경우 그들은 계몽이 된 것일까. 계몽의 대상일까. 실제로 지금 우리 사회는 한쪽에서는 난독을 가장해 거짓으로 대중을 호도하고, 한쪽에서는 실질적 문맹이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친다. 거짓과 문맹 사이에서 살아가는 오늘이 버겁다. 매일 모욕을 뒤집어쓴다. 매일 거짓이 밥먹듯이 승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크고 아름답지만, 많은 모욕을 당했어요. 모두들 각자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모욕당한 세상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세상은 계속해서 모욕을 당하고 있지요”(《시칠리아에서의 대화》, 184).
세상은 모욕을 뒤집어쓰고 나도 모욕을 느낀다. 그러나 어떤 기만으로도 당해낼 수 없는 건 ‘기억’이고 ‘울음’이다. 우리 안의 어떤 기억들의 주인은 온전히 스스로이다. 어쩌면 그 모욕의 뜨거움으로부터 도피라고 할 수도 있겠다, 중세에 대한 기억은. 그래서 이래도 저래도 뜨거운 여름일 수밖에 없었다.
중세의 자취는 늘 눈물겹게 반갑게 그립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사랑하는 이에 대해서 알고 싶듯이,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도 늘 그립고 외로움이 일듯이, 이탈리아에서 중세의 그 무수한 자취를 일상적으로 밟고 걷고 바라보고 사는 그들의 도시를 맹렬하게 추격하면서 내 안에서 흘린 눈물은 폭염으로 흘린 땀만큼이나 뜨겁고 아렸다.
연인의 눈빛을 읽고 싶은 갈망, 그의 몸짓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싶은 간절한 마음, 잠시라도 더 그의 곁에 머물고 싶던 목마름. .....더욱이 그토록 짧은 만남과 이미 알고 있는 헤어짐의 날짜 때문에 순간순간이 더 애틋했다. 잡을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는 만남을 내 안에 새기느라 총총총 몸과 영혼이 줄곧 바빴다.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그토록 애타게 갈망했듯이 그들의 자취를 좇는 내 사랑도 끝없이 애가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