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르모의 로살리아, 오늘 우리의 로살리아
붉은 태양. 팔레르모의 붉은 태양이 바다에서 떠오른다. 눈을 뜨고, 내가 눈을 뜬 침대가 팔레르모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이미 태양은 방 안 가득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커튼을 뚫고 밀려드는 태양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다. 일어나 창을 여니 바다 한가득 일출이 시작되는 중이었다. 이탈리아 순례의 첫날, 장엄한 일출이었다.
전날 밤 공항에서 호텔로 들어갈 때 노점들이 환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성녀 로살리아 축제를 맞아 늦은 밤까지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혹 로살리아 축제의 행렬과 마주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몬테 펠레그리노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랐다. 전에는 멀리서 가까이서 바라보며 지나갔던 산에 접어들게 되었다. 해발 600미터 정도 되는 산을 오를수록 팔레르모가 조금씩 시야에 들어왔다.
기대와 달리 450미터 정도 몬테 펠레그리노 중턱에 자리한 로살리아 성소는 인적이 없었다. 축제의 어떤 흥분도 없었다. 다만 성소를 맡고 있는 신부님의 고조된 환대가 약간 당황스럽게 우리를 반겼다. 당연할 일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몬테 펠레그리노에 오르다니!
팔레르모가 눈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성소 건물과 이어지는 허연 석회석 암벽을 파서 마치 루르드 동굴처럼 만든 작은 벽감에 성모님과 소녀상이 들어 있고, 그 바위 틈새에 보라색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박한 문을 들어서니 한 손에는 성경과 해골을 들고, 십자가를 든 한 손은 번쩍 쳐든 로살리아의 상이 작은 성당 앞에 서 있다. 그녀의 발치에는 동굴로부터 흘러나오는 물길이 이어졌다. 동굴이 흔히 그렇듯이 좀 기괴한 느낌이었다. 특히 성모마리아를 둘러싼 파란불이 더 그랬다. 보아하니 그 파랑은 지금도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아주르(azzurro)색이었다. 귀한 광물인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바로 청금석의 색깔. 가장 공경하는 이를 가장 귀한 색으로 치장한 것이다.
팔레르모 사람들에게 몬테 펠레그리노는 신성한 산이었다. 아마도 로살리아가 살았던 동굴에는 아나톨리아의 대지모신 키벨레부터 카르타고와 페니키아 시대 다산의 여신들 성소가 있었고, 7세기경에는 비잔티움 사람들이 성모마리아에게 봉헌한 작은 성당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이탈리아 남부에는 성화상논쟁 때문에 피신한 비잔티움 사람들도 많았다. 많은 수도자들도 떠나왔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동굴과 숲으로 숨어들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동굴은 도시 사람들에게도 입소문으로 퍼졌을 것이다. 로살리아가 살던 시기는 아랍인들이 떠나고 루지에로2세가 다시 한 번 그리스도교적인 세계를 만들어가던 때였다. 이교도가 물러간 세상에서 로살리아는 세상의 아름다움 너머 영원한 것을 갈망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결혼식 준비를 하던 로살리아가 거울 속에 나타난 예수를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들은 후 세상을 떠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어떤 짧은 애니메이션에서 그는 노르만 굴리엘모 왕의 아들과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도망을 쳤다. 아마도 로살리아는 바실리오회에 입회한 것으로 보인다. 동방가톨릭교회 수도원이었다. 아드리아나 숲에서 참회의 삶을 시작한 그는 다시 팔레르모로 돌아와 1160년경 서른다섯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8년 정도를 이 성모마리아의 동굴에서 살았다.
그가 죽은 지 450여년이 지난 1624년, 팔레르모에도 흑사병을 실은 배가 들이닥쳤다. 도시에 퍼진 전염병은 순식간에 수천 명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듬해 로살리아가 한 남성에게 나타나 자신의 유해를 찾아 대주교에게 알리고 도시를 행렬하라고 알렸다. 그의 말대로 유해를 찾아 시민들이 뒤따르며 팔레르모 시내를 세 번 돌았을 때 흑사병이 멈췄다. 그는 팔레르모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됐고, 1626년 몬테 펠레그리노의 동굴은 거룩하게 조성되었다.
로살리아, 루술리아가 오백 년이 지날 즈음 다시 '부활'한 건 왜일까? 루지에로2세 시절은 팔레르모의 가장 빛나는 순간, 화양연화였다. 200년 넘게 지배하던 아랍인들을 제압한 저 북구의 노르만족은 이 섬을 놀라운 융화의 세계로 꽃피웠다. 피렌체나 시에나 등 이탈리아 본토의 도시국가들이 겨우 뿌리를 내리던 시기였다.
루지에로2세가 세운 시칠리아왕국이 팔레르모 사람들의 굳건한 뼈대라면, 로살리아가 의미하는 종교적 삶은 그들의 일상을 숨 쉬게 하는 대기 같은 것일까?
1624년에 로살리아의 유해가 발굴된 후 콜레라가 창궐한 1837년과 혁명으로 행렬이 불가능했던 1848년과 1849년을 제외하고 팔레르모 시민들은 해마다 행렬을 하며 수호성인의 축일을 기념해왔다. 매년 놀랍게 거행되는 로살리아 축제의 재현은 어떤 것을 현재화한다. 말하자면 기억의 현재화다. 축제는 미사 전례가 지향하는 바와 같은 의미를 요청한다. 과거를 기념하며 현재화하고 미래의 희망을 새롭게 하는 일, 미사 전례의 지향이다. 그렇다면 팔레르모 사람들이 축제를 통해 확인하는 희망은 뭘까.
7월에 팔레르모를 가득 메우는 축제가 지나가고, 그가 죽은 9월에는 수천 명의 순례자가 4킬로미터의 오래된 옛길을 따라 산꼭대기 성소에 오른다. 몬테 펠레그리노에는 로살리아를 기억하는 여러 장치가 있다. 꼭대기에는 커다란 성녀의 조각상이 팔레르모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고 한다. 팔레르모 사람들은 8월 말부터 성녀를 기억하며 9일 기도를 바친다. 그 기도가 향하는 목적지는 이 동굴이다. 그들은 동굴 성당 왼쪽에 자리한 로살리아의 성소 앞에 무릎을 꿇는다.
화려한 장식 앞에 꽃이 놓인 성소에는 유리로 된 공간에 한 여인이 있었다. 유해가 발견된 당시처럼 재현해놓은 로살리아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귀를 쫑긋 세워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고 한다. 아마도 이 여인이 괴테가 본 바로 그녀였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타오르는 몇 개의 램프 불빛 아래 한 아름다운 여인의 방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황홀경에 빠진 듯 누워있다. 두 눈은 반쯤 감겨있고 많은 반지를 낀 오른손으로 무심한 듯 머리를 받치고 있다. 그 모습을 충분히 관찰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아주 특별한 매력을 느꼈다. 그녀의 옷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고, 흰 대리석으로 만든 머리와 손은 아주 잘 만들어졌다고는 볼 수 없으나 그녀가 숨을 쉬고 움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괴테는 그 여인의 모습이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차마 더 이상 쳐다보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했지만 사실 좀 어색하고 유치했다. 여러 겹의 팔찌와 반지와 황금빛 화관까지 쓴 그녀는 황금색 옷을 입고 십자가를 들고 비스듬히 누운 모습이었다. 한 천사가 백합 가지를 들고 그녀를 옹위했다.
1625년 로살리아 성녀의 동상을 만든 그레고리오 테데스키는 시라쿠사의 성녀 루치아 석상도 제작했다고 한다. 대략 300년경에 순교한 루치아와 카타니아의 아가타, 그리고 로살리아는 시칠리아에서 공경받는 세 처녀 성인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 작은 공간이 로살리아가 은수하던 동굴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몸이 들어앉은 동굴.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작은 동굴은 순례지가 되었고, 이 산은 ‘순례자의 산’, 펠레그리노라는 이름을 얻었다. 팔레르모에서 흑사병을 끝내준 로살리아 성녀. 코로나19 확산은 전 지구적인 재앙이다. 이제 우린 기도도 전 세계를 염두에 두고 해야 한다. 모두가 서로에게 이어져 있는 인드라망의 구슬이다.
산을 다시 아슬아슬 내려와 그토록 오래된 도시,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한여름 낮의 골목들을 지나 누오보 문이 보이는 곳에서 내렸다. 이슬람이 약진하던 10세기에는 300개 이상의 모스크가 있었다는 도시, 다시 그리스도화된 이후에는 100개의 성당이 있었다는 도시 팔레르모의 한복판이었다. 누오보 문을 들어서 팔레르모 대성당을 향했다. 대성당 골목과 앞마당에는 성녀 로살리아 축제를 위한 준비로 분주한 분위기였다. 앞마당에는 촬영 장비들이 설치되어 전경을 찍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