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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Jun 02. 2023

세상 모든 좋은 꽃말, 은방울꽃

홍천의 그 숲은 뜻밖이었다. 나지마한 산의 정상에 꽃들이 피고 지는 아늑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분홍은방울꽃이 사는 숲이었다. 조금 더 깊은 곳에는 수백 수천의 큰애기나리가 핀 초록 숲도 이어졌다. 고개를 숙인 채 피어 얼굴은 보이지 않고 초록 잎만이 가득한 사이사이에 당개지치와 감자란과 또 다른 무수한 꽃들이 뒤섞여 피고 지는 비밀의 화원이 거기 있었다. 


분홍은방울꽃, 홍천(2019. 5. 19.)


그날은 비랑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잠시 소나기 내리다 그친 숲은 원초의 생명이 푸르렀다. 분홍 은방울꽃들이 댕그렁댕그렁 출렁였다. 진주 알갱이들이 흩뿌려진 숲이었다. 햇빛이 갓 영글고 있는 진주알을 싱그럽게 물들이는 동안 또 다시 키 큰 나무 저 끝으로부터 바람소리가 전해졌다. 또다시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바람이 몰려오며 다시 비가 내렸다. 장대비는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지만 비를 그을 데는 없다. 


한 알 한 알 은종처럼 매달린 이 꽃은 앙증맞을 정도로 어여쁜데 전해지는 이야기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아래에서 성모마리아가 흘린 눈물, 그 눈물에서 피어난 새하얀 눈물방울! 혹은 에덴동산에서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이브가 흘린 회한의 눈물에서 피어났다는 꽃! 줄기에서 아슬아슬 매달린 꽃이 종 모양이거나 눈물방울 같아서 그런 이야기들이 생겨났던 것도 같다. 


은방울꽃, 서삼릉(2020. 5. 9.)


눈물은 때로 사람을 정화한다.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처럼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이 위안으로 가득해지기도 한다. 그래선지 은방울꽃은 ‘영혼의 정화’라는 꽃말도 갖고 있다. 사실 은방울꽃은 온갖 좋은 의미의 꽃말을 다 가지고 있다. ‘모든 근심의 끝’이라는 꽃말은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거라는 예고일 것이다. 더 나아가 ‘다시 찾은 행복’ 속에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라는 꽃말까지 있다. 꽃말만으로도 은방울꽃은 부케에 잘 어울린다. 그레이스 켈리와 케이트 미들턴이 은방울꽃 부케를 들어서 더더욱 많은 신부들이 선망하는 부케가 되었다. 은방울꽃을 받으면 행운이 온다고 해서 특히 프랑스에서는 5월 1일 은방울꽃을 선물한다고 한다.      

꽃보다 향기가 또 매혹적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많은 꽃이 핀 숲에서도 향기를 맡지 못했다. 자극적이고 강렬한 향이 아니라 고요하게 마음으로 호흡해야 가능한 향인지도 모르겠다. 멈춰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야 알게 되는 것이었을 수도. 언제쯤 은방울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까. 

어여쁜 꽃과 매혹의 향을 가진 은방울꽃은 뜻밖에 독초다. 그것도 무척 치명적인 독초여서 동물들도 피해 다닐 정도라고 한다. 너무 아름다운 것은 위험하다. 아니, 아름답기에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걸까. 식물들 역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저마다의 전략을 갖고 있다. 

오래 견디고 오래 아파하는 시간의 결정체 진주는 소금처럼 쓰라린 눈물의 기억 속에 영글어간다. 상처가 깊어, 위로받지 못한 밤과 낮이 길어 독을 품기까지 했던 걸까. 은방울꽃이 진주처럼  영글었다. 이 숲에는 꽃잎 끝이 발그레 물든 분홍은방울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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