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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Jun 01. 2023

꽃등, 진달래꽃

꽃이 지천인 산이 있다. 천마산이나 세정사 계곡, 광덕산 같은 곳이 그렇다. 그곳에 들어서면 발길마다 기다리고 피어 있는 꽃들을 보느라 속도가 느려진다. 그런데 처녀치마 만나러 올라가는 북한산 진관사 뒷길은 아무리 봐도 꽃이 안 보였다. 덕분에 처녀치마는 어디 피었을까만 생각했다. 


산을 오르자 진달래가 기다리는 마음에 안겨들었다. 빛이 좋은 시간, 햇빛을 고스란히 받은 진달래꽃이 어둑한 숲 속에서 등불처럼 반짝였다. 걸을 때마다 다른 배경에서 피어난 진달래에 푹 빠져 걷다 보니 ‘진관사’가 ‘진달래 진’ 자를 썼나? 어이없는 생각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진달래는 먹는 꽃 /  먹을수록 배고픈 꽃……’ 

조연현의 시구가 마음에 떠오르는데 마음이 자꾸 반짝였다. 배고픈 기억도 다 잊고 진달래꽃 꽃등에 마음이 물들어버렸다.         


진달래, 북한산(2020. 3. 30.)



꽃은 물든다

햇빛에 물들고

비에 물든다     


한낮의 산에 불 밝힌 저 꽃들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꽃은     


빛과 그림자 뒤섞인 틈에 꽃등 들고 선 신부,

제 안에 불 밝히고 저리도 환히 피어난 슬기로운 처녀들     


꽃처럼 산다는 건 저렇듯 유순하게 빛에 젖는 일

기꺼이 무언가의 일부이길 두려워하지 않는 일

아름다운 당신께 물들기를 순식간에 갈망하는 일     


그러니 얼마나 먼 일인가, 꽃을 닮는다는 건

겸허하게 꽃등 하나 밝히지 못하는 나는     


이쯤 되면 

길 하나는 만들어야 했다

내 길을 열고 너를 위한 이정표도 세워야 했다     


저 꽃들마저 등 밝히며 길을 이끄는데

아직 길도 못 찾은 채 헤매고 있는 

한 사람     


마음에 불 밝히는 대신 

마음이 그저 붉어졌다     



처녀치마, 북한산(2020.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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