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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Jun 02. 2023

나를 잊지 말아요, 양귀비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작은 절집 뒤란에 양귀비가 붉게도 피었다. 사이사이 하얀 글라디올러스도 피어 더 묘한 정취였다. 아주 오래전 있었던 옛 절이 불타 없어진 후 자그맣게 다시 세운 기도의 집이라고 했다. 바다와 꽃과 절. 인적도 드물었고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 고무신 때문인지 모르겠다. 마당에도 드문드문 핀 양귀비 사이에 매일 기도하고 노동하는 수도승들이 일할 때 신느라고 놓아둔 고무신이 있었다. 문득 꽃과 함께 어떤 마음들이 밀려들었다. 어찌할 수 없는 마음들이 꽃처럼 뒤섞여 피어났다가 소멸되는 여정, 그 마음의 뒤안길이 짠했다. 그 낮과 그 봄과 그 석양, 그 낮에 뿌렸을 양귀비와 그 오후에 심었을 그리움과 또 어느 날 밀려왔다 밀려가버린 저 바다의 파도.


바다를 내려다보는 양귀비와 글라디올러스, 태안(2020. 5. 8.)


양귀비는 오래된 꽃이다. 오래된 신화에도 무척 자주 언급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 꽃은 데메테르와 아프로디테, 헤라와 키벨레 등을 상징한다. 다들 제우스의 여인이다. 하나의 꽃이 3만 개의 씨를 퍼트려  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다산을 기원하는 여신들의 상징이었다. 다산이 곧 부를 의미하기도 했으므로 헤르메스의 상징이기도 했다는데, 동분서주 그 헤르메스가 다산의 신이기도 했던가? 

그리고 양귀비는 잠의 신 히프노스가 사는 동굴 입구에 만발했다는 꽃이다. 그의 동굴은 낮과 밤이 만나는 곳으로 레테 강이 돌아 흐르는 곳이었다. 한 모금의 망각과 한 모금의 도취가 있는 동굴에서 밤의 신 닉스의 아들이자 꿈의 신 모르페우스의 아버지인 히프노스는 늘 잠들어 있었다. 잠과 꿈은 때로 망각이다. 도피이자 도취다. 그래서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친 망각과 도피는 생을 부숴버린다. 양귀비는 어쩌면 위안과 파멸 사이에 있다. 한 생을 담백하게 내어놓은 수도승들의 집에 저 붉은 꽃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어쩌면 수도승들의 삶 자체가 위안과 파멸 사이를 오가는 외줄 아닐까. 전부 아니면 전무. 그들은 위태로운 한 생을 건넌다. 저토록 붉게, 저토록 간절하게.


양귀비는 너무나 빨리 잊히고 마는 사랑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프로디테가 그랬다고 한다. 아도니스, 아도니스....아름다운 연인의 죽음 앞에서 아프로디테는 너무도 빨리 고통을 벗어 던졌다. 아도니스가 뜨겁게도 한 송이 양귀비로 피어난 순간 이 여신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 가벼워졌다. 양귀비는 홀로 뜨겁고 홀로 타올랐다. 그래서 어쩌면 그 심중의 뜨거운 한마디가 ‘나를 잊지 마세요’였던 건 아닐까. 오히려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싶어졌다.


그곳에서 하루쯤 묵고 싶었다. 하루를 머물고 싶었던 건 기도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무릇 기도는 스스로를 잊어버릴 만큼 도취의 시간이다. 그 순간 아득한 위안이 온다. 비로소 영원이라는 세계의 문이 열린다. 살아가는 날의 희로애락을 넘어 무엇에도 잃지 않을 힘이 뿌리를 내린다. 그 집에 사는 이들에게 매 순간이 그런 도취의 연속이기를 기원했다.     




왜 이 붉은 꽃이 물망초 같은가

이토록 정염 깊은 꽃이 수도승의 집에 있어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집에 있어서

문득 저 붉은 꽃잎이 말하는 것 같았다  

   

“나를 잊지 마세요”

내가 떠나가도 내가 침묵해도

바다로 난 길을 향해 언제든 달려가는 마음을

꽃 피고 지는 숲에서 만나지는 마음을   

  

그렇게 들렸다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잊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한다면, 그 말을 전한다면

이제는 경계 따위 사라지는 사랑을 하셔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옛말은 

풋사랑의 말이란 거 이제는 아는 눈빛으로     

  

보셔요, 저리도 붉은 입술의 담긴 말을

진주보다 더 오래 더 치열한 파도를 떠안았다 밀려가던 마음결에

찢어지고 깁고 너덜너덜해졌던 그 봄과 밤들의 기억을     


저 붉은색이 물망초의 말을 마음에 담기까지 

홀로 깊어온 사랑을 

이제 돌아봐 주셔요, 나를 잊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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