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과 순례를 할 때 늘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사진을 찍느라고 뒤처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이 늘 좋다. 초를 켜서 봉헌하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며 늘 그 기원에 마음을 보태게 된다. 내가 쏘는 ‘화살기도’도 덩달아 촛불을 밝힌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 주변을 산책할 때도 새벽을 여는 기도 중인 뒷모습을 만나곤 했다. 갈릴래아 호수의 그 아침은 참 좋았다. 장엄한 일출을 배경으로 성무일도를 바치는 뒷모습을 보았다. 찬란한 빛에 부겐베리아 잎이 투명하게 황금빛 찬란한 그 아침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꽃은 빛이 오는 뒤에서 역광으로 볼 때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빛을 보고 싶어서 뒤로 갔다. 햇살이 통과하는 잎을 보려고 뒤로 갔다. 투명하게 드러나는 잎의 환희에 물들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뒷모습에는 햇살에 물드는 환희 이전에 겨울을 지나온 상처가 남아 있었다. 때로는 꽃잎이 떨어지고 때로는 찢어진 잎 그대로 흙투성이인 잎들. 반가운 마음에 그저 좋아 달려갔다가 그 모습을 보면 멈칫 속도를 늦추게 된다. 애썼구나, 정말 수고했구나. 다독다독 인사부터 건네게 된다.
사람들 역시 뒷모습은 정면과는 다를 때가 있다. 누군가는 등 뒤로 비수를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뒷모습에서 그가 지나온 겨울을, 그가 지나온 십자가의 길을 본다. 꽃들이 길고 엄혹한 추위 속에 걸어온 그 인고의 시간을 만난다. 그래서 꽃들의 뒷모습을 보며 뭉클해지는 것이다.
미셸 투르니에는 “뒤쪽이 진실이다”라고 썼다.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라고도 덧붙였다. 나태주 시인도 <뒷모습>에서 “… 뒷모습은 / 고칠 수 없다 /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썼다.
꽃이야 사람과 달리 감추고 싶은 진실이 있을 리 없지만 꽃의 뒷모습은 늘 예사롭지 않다. 그래도 늘 꽃들의 뒷모습을 찾는다. 어쩌면 상처가 남은 뒷모습에서 얻고 싶은 뭔가, 보고 싶은 뭔가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혹시 꽃들도 뒷모습을 감추고 싶은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