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날의 숲

by 이아인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창세 1,11-13)



야생에 핀 꽃을 보는 건 태초의 순간을 만나는 일과도 같다. 누군가 뿌린 것이 아니고 누군가 심은 것이 아닌 뿌리에서 저 홀로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을 보낸 꽃이 피어난다. 그 홀로 보낸 그 시간은 창조주의 시간이기도 하다. 무에서 세상을 빚어놓은, 무에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무에서 찬란한 빛과 색과 모양과 흔들림과 형태를 빚어놓은. 그리하여 줄탁동시의 시간. 꽃은 피어난다.


그 순간의 감동은 그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아름다움은 기한이 있다. 시들고 식상해진다. 부서지고 지루해진다. 다만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야생의 생명체들은 여전히 무한한 놀라움을 자아낸다. 야생의 풀꽃을 만나며 시인이 되는 이유다. 시인이고 싶어지는 이유다.


봄이 오는 숲속에는 성스러움의 본질이 깃들어 있다. 다른 시선으로 보면 그 숲은 거의 폐허와도 같다. 지난해가 스쳐간 죽음의 시간, 소멸의 시간이 영그는 공간이다. 바로 그곳으로부터 생명이 움트고 꽃을 피운다. 봄날 그 폐허로부터 피어오르는 작은 꽃들은 순식간에 창조의 세 번째 날로 이끈다. 신비가 그곳에 거한다. 내가 그 알지 못하는 신비에 물든다. 숲에 머무는 시간, 내게 다시 생명을 묻는다. 진리를 묻고 책임을 묻는다. 악을 끊어버리겠느냐고, 좌절을 끊어버리겠느냐고, 슬픔을 끊어버리겠느냐고 묻는다. 숲에서 홀로 세례를 갱신한다. 새로 피어나는 꽃들 속에서 나도 다시 태어난다.


갓 생명이 시작되는 세 번째 날의 숲에는 바니타스가 함께한다. 꽃은 시들고 마른다. 그리고 소멸한다. 피어난 순간을 기뻐하고 아름다움을 나누고 고마워해야 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다 그렇듯이. 그 순간에는 자꾸 어린왕자의 ‘장미’와 모모의 로자아줌마 생각이 난다.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걸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숲에 머무는 시간, 사랑의 노래가 들린다. 사랑의 고백이 들린다.


“…그분은 수천의 선물들을 뿌리며

황급히 덤불숲을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가면서 그것을 바라보았지요.

단 한 번의 그분 자태에

숲은 아름다움으로 옷 입혀졌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산 후안 데 라 크루스 시집>)


스페인의 시인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돌아다니는 모든 것들이 / 당신이 베푼 수천의 은혜들을 말하고” 있는 세상을 노래했다. 나도 숲에서 그 수천의 은혜를 만난다. 사람들의 마을에서는 좀처럼 알기 어려운 일들을 숲에서 배운다. 듣는다. 그래서 알게 되는 것이다.


꽃이 피는 시간은

속삭이는 때이다

피어나는 건 꽃이지만

하느님의 죽비가 영혼을 톡톡 치시는 거다


이렇게 생을 너에게 주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생명을 너에게 불어넣었다


나는 잊었으나,

하느님 기억엔 장착된 데이터가

자꾸만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하는 봄

어린 내가 밟혀 자꾸 우시는 봄


비가 내리는 건 그 이유다

기억하라고

너 또한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였다고

너무나 어여쁜 존재 앞에서 눈물을 흘려본 사람은

하느님의 눈물도 알

이렇게 꼬물꼬물


꽃보다 이쁜 시간이었던 몇 해 전

몇십 년 전


그 봄, 그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