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만나고, 꽃을 찍는 일은 정해진 목표도, 할당량도 없는 일이다. 온전히 내 마음의 충족일 뿐이다. 그래서 돌아서 내려올 때쯤이면 늘 평안한 상태가 된다. 그러다 또 문득 묻는다. ‘이렇게 좋아도 되나? 이렇게 편해도 되나?’
우린 참 가진 게 없었다. 가진 게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있었던’ 것마저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너나없이 힘겹다는 걸 서로가 알았기에 서로의 ‘없음’을 연민하고, 그럼에도 작은 것에 고마워할 수 있었다. 그런 기억들이 잠재의식으로 남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누군가는 힘들 텐데, 여전히 사람들은 크고 작은 아픔으로 신음할 텐데 이렇게 꽃길에서 마음의 충족을 즐겨도 되나……. 어쩌면 그런 물음으로 내 기쁨을, 내 행복을 정당화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난 이만큼은 힘들어 하고 있어. 난 이만큼은 남 생각, 세상 생각도 하며 살아. 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니야...
인스타그램이 ‘자기자랑’이란 걸 너도 알고 나도 알면서도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누군가의 ‘자랑질’에 금세 마음이 시끄러워지고 마는 세대에게는 너무나 낯선 감정일 수도 있겠다. SNS를 보면, 나만 빼고 모든 지인이 다 해외여행 중이고, 나만 빼고 모든 사람이 근사한 곳에서 먹방을 하고, 나 말고는 모두가 반짝이며 사는 거 같다고들 한다.
과장인 줄 알면서도 부러워하고,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과 ‘부자 부모’와 ‘멋진 연인’들로 인해 마음에 가시가 박히곤 한다. 하지만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릴케의 <엄숙한 시간>을 아는 세대는 지금 지구의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를 위해 울기도 웃기도 하고 나를 향해 오고 있기도 한다는 걸 기억한다. 모든 것이,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드라망의 구슬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내 기쁨이 나만의 것이 아니고 내 아픔도 나만의 것이 아니었으면 한다. 타인의 기쁨도 같이 기뻐하고 싶고 사소한 아픔이라도 쉽게 대수롭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모쪼록 내가 기쁜 만큼 그대도 충일하기를, 그대도 모쪼록 평안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된다.
산을 내려올 때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꽃을 만나고 들여다보고 귀 기울이며 그만큼 마음이 여유를 찾았다는 얘기다. 나름대로 가벼워져서 사람들의 세상으로 돌아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