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by 이아인


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질수록 /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희미해진다면

이 먹빛이 마름하는 날 / 나는 당신을 잊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시 ‘초원의 빛’은 조병화 시인이 의역해서 더 소녀소녀 한 문장으로 시작됐다.

워즈워드의 이 시는 영화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 1961)> 덕분에 더 많이 알려지고 더 많이 기억되었다. 1920년대 미국 캔사스의 작은 마을이 배경이니 지금과는 참 많은 것이 다르다. 영화의 갈등구조도 그렇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들에게 너무나 당연히 순결이 요구되던 사회상이 영화의 주된 갈등 요소 중 하나였다.


나탈리 우드가 열연한 ‘디니’와 워렌 비티가 맡은 ‘버드’는 한마을에 살며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연인이지만 당시 사회의 도덕적 억압 등으로 갈등을 겪으며 이별을 맞게 된다. 결국 디니는 신경쇠약으로 병원 신세를 지면서 상처를 치유해가고, 버드는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대학에 갔지만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토록 서로에게 간절했던 연인의 삶이 이제 평행선을 그어간다. 풋사랑이었지만 너무도 순수하고 깊었던 사랑으로 힘들던 시간이 지나고 디니가 드디어 병원을 나서던 날, 의사가 묻는다.


“버드를 만날 거니?”

그리고 답을 말해준다.

“때로는 두려움에 맞서야 아무렇지 않게 될 수 있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버드를 만나고 돌아서며 디니는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를 읊조린다. 고교 시절 어느 날, 사랑의 고통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디니에게 선생님이 일어나서 읽으라고 했던 바로 그 시였다.


“.....초원의 빛 꽃의 영광 그 시간들을, 다시 불러올 수 없다 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그날 디니는 시를 낭송하다가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읊조리는 그 시구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메아리로 돌아온다. 이제 소녀가 아닌 디니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이 시는 독립적인 작품이 아니라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불멸성을 깨닫는 노래>라는 장시의 일부인데, 디니가 읽은 부분은 이렇게 이어진다.


.........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이제까지 있어왔고 또 존재할 시적 감수성을 통해

마음을 위무하는 생각은 인간의 고통에서 솟아난다

죽음을 겪고서야 비로소 보게 되는 신앙을 통해서

그리고 지혜를 가져다주는 세월을 통해서


봄날의 설렘이 지나고, 초여름 신록의 눈부심도 사라진 자리에서 문득 디니가 읊조린 시가 마음에 콕콕 박힌다. 눈부신 시간이 지나가버린 지금 남은 것들에서 힘을 찾아야 한다는 시구를 떠올린다. 계절의 끝자락만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도 마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디니에게 버드를 만나는 일이 두려움이었던 것처럼 종종 지난날을 대면하는 일도 두려움이다. 분명히 위로와 기쁨만이 아니라 실패와 슬픔의 자취가 너덜너덜하기도 하니까. 그럴 때 또 누군가의 글이 손을 내밀어 준다.

"내 인생은 순간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 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 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성석제가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에서 담담하게 나눠주는 말에 기대 한때 눈부셨던 내 안의 기억들과 그 그림자까지도 겸허하게 바라볼 힘을 얻는다.


이제는 종종 가을 같은 서늘한 바람이 스친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모든 게 떠나고 난 숲에서 지난날을 고마워하며 내 안에 뿌려진 씨앗을 돌봐야겠다. 때론 초라하기도 하고 때론 안쓰럽기도 하지만 가장 먼저 지난 시간의 수고를 위로하며 나 자신을 다독이련다. “우리 다들 수고가 많았잖아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남겨진 것들, 뿌려진 것들을 잘 살펴가 보려 한다. 그것이 나이 듦의 미덕이자 능력이라는 생각을 하니 나이 드는 일이 꼭 슬프거나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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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함. 화양연화. 광채. 눈부신 한때. 청춘. 만개. 봄 지나고 여름도 지나가는 숲을 헤매며 마음에 콕콕 새겨지는 말들이다. 이제 해야 할 일은 ‘그 뒤에 남은 것들에서 힘’을 찾는 것! 꽃 진 계절의 뒤안길에서 쓸쓸함만을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분투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