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 메멘토 모리

by 이아인


묘지에도 꽃이 핀다. 가장 잘 알려진 건 할미꽃이지만 그밖에도 참 많은 어여쁜 꽃들을 무덤에서 만난다. 죽음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생의 역설이다. 제비꽃은 무덤에도 많다. 솜나물을 볼 수 있을까 찾아간 동막골 어느 무덤에서 만난 제비꽃은 유독 빛깔이 깊었다. 꽃 자체로도 가이없이 아름다운데 그 공간의 고요가 더욱 묵언의 향기를 자아냈다.


오며가며 무덤에서 꽃을 찍었지만 일부러 찾아간 건 타래난초 때문이었다. 그 묘지에는 꽃이 많았다. 망초는 새하얀 천사의 날갯짓처럼 묘지를 온통 감싸안았다. 무덤 사이를 지나며 타래난초를 찍다 보니 미풍에도 흔들리는 꽃이 있었다. 아슬아슬한 줄기로 서 있던 꽃, 산해박이었다.


알고 보니 이 꽃의 꽃말은 묘지에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먼 여행’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만났다, 산해박이라는 꽃! 무덤에서 만나는 ‘먼 여행’이라는 꽃말은 이미 먼 여행을 떠난 이들의 집에서 언젠가 떠나게 될 먼 여행을 예감하게 했다. 가뜩이나 진지할 수밖에 없는 무덤에서 조금 더 숙연해지고 있었다. 너무 가물어선지 가늘디가는 줄기에 제대로 붙어 있는 잎마저도 없었다. 잎도 찢겨져 나간 여린 줄기로 꽃과 열매를 이고 선 줄기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산해박은 뱀이 출몰하는 따뜻한 초지에 피고,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겼을 때 독으로 치료해주는 약용 식물이다.


산해박(2021. 6. 26.)



















타래난초(2019. 7. 14.)





















애기풀도 반가운 꽃이다. 그런데 이름과 꽃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왜 그런 이름이 주어졌을까 궁금한데 꽃말은 더욱 뜬금없다. ‘숨어 사는 자’라니, 이 ‘애기’한테 숨어 사는 자라니.


숨어사는 자는 홀로 고독한 자다. 모나쿠스mónăchus, 수도자가 바로 그렇다. 영어 단어로는 에르미타주(Hermitage)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그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박물관과 같은 이름이다. 러시아 제국의 그 엄위한 궁전 이름이 ‘은둔처’라는 걸 알았을 때 좀 웃었다. 러시아에서는 이 정도의 규모가 ‘암자’라고? 무덤가에서 애기풀을 찍다가 ‘러시아 방주’까지 여행을 한다.


애기풀은 작지만 혼자 피지 않는다. 줄기마다 여러 개의 꽃이 같이 핀다. 숨어서 피지도 않고 홀로 은둔하지도 않는다. 무덤가에 피는 꽃의 꽃말로는 어울리지만 꽃 자체와도 그다지 맞지 않다. 무슨 맥락에서 이런 꽃말이 회자되어온 걸까. 살아가는 내내 참 많은 역설을 만나지만 무덤가에 피는 애기풀의 화사한 표정도 역설의 장면이다. 고귀한 자색으로 피는 이 꽃은 깊고도 매혹적인 의상을 하고 무덤가에 핀다. 아마도 볕이 잘 드는 곳을 찾다 보니 나뭇그늘이나 잡초가 없는 무덤가에 자라게 된 모양이다.


IMG_0688.JPG


IMG_0715.JPG 애기풀, 양평 동막골(2020. 4. 15.)


무덤에서는 구슬붕이와 솜나물을 찍고 영국병정지의도 만난다. 어느 날은 아주 작은 꽃을 찍었는데 며칠 후에야 이웃 블로그에 갔다가 이름을 알게 되었다. ‘주름잎’ 누군가의 무덤가에 피었던 그 주름잎의 꽃말이 조금 슬펐다.


무덤가에 핀 주름잎

꽃말이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 밤, 네가 주는 말 한마디

또 슬프다

내가 너를 잊지 않는다


타래난초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도 만난 여러 꽃들, 무덤에 피는 꽃들은 다정하게 생과 죽음을 들춰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