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장미에게 책임이 있어

by 이아인


꽃은 거기 피었다가 시나브로 진다

내가 꽃을 보는 순간

내 안에서 꽃이 살아나고

비로소 나의 꽃이 거기 피고 진다


꽃을 보는 일, 만나는 일이 특별해지는 건 이것 때문이다. 내가 찍은 사진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사진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내 사진 속의 그 꽃은 내가 만난 내 꽃이다. 불가역적인 사실이다. 나는 내 꽃에 책임이 있다. 사진 작품으로서, 혹은 꽃 자체의 기록으로서 부족하고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내 꽃을 그리워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에게 물을 주었던 책임, 그를 돌아보았던 책임, 그와 함께했던 책임. 어린왕자가 장미에게 가지는 책임은 행위 하였으므로 발생한 것이다.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게 된 책임이다. 꽃들에 대해서, 나도 책임을 느낀다. 내 기억이 된 꽃들을 책임져야 한다.


난 기어이 꽃을 보러 갔다. 시간과 마음을 챙겨 가까이 혹은 멀리로 찾아갔다. 내가 보았으므로 나의 꽃이 된 모든 꽃들. 그 순간 꽃과 나는 만났다. 적막한 우주의 한순간,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텅 빈 적요에서 오직 꽃과 나만 존재했다. 그 순간에 대한 책임. 그 순간이 주는 책임은 꽃들이 주는 말, 꽃들이 주는 사랑, 꽃들이 가르쳐주는 것들로 마음의 자리를 넓히고, 그 마음의 자리가 꽃자리가 되게 하고, 꽃을 닮은 향기를 얻으라는 것이다. 그걸 기억하는 일이다. 꽃을 만나던 순간을 잊지 않고, 그 순간의 충일한 행복을 상기하며 새롭게 찬탄하고, 그 순간의 주인을 또 기억하는 일.


꽃을 만나는 순간은 총체적인 축제다. 빛과 꽃들과 바람의 교향악 속에 빛과 꽃들과 바람이 찬연하다. 뒤이어 찬미와 감사가 밀려든다. 꽃들과 함께하는 순간, 유일하게 은자가 된다. 내 안의 꽃들, 내 안의 빛들이 탄생한다. 부활한다. 우리가 비로소 어떤 관계가 된다. 우리가 비로소 서로에게 길들여진다.


성 목요일 밤, 예수는 가장 낮은 자세로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 자기 차례가 되자 그 우직한 베드로가 “제 발을 씻기다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라며 극구 손사래를 쳤다.

그때 예수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발을 씻기는 행위는 사랑이었다. 너와 내가 어떤 관계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행위였다.


꽃은 거기 있었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내가 다만 그곳을 스쳐 지났다면 여전히 그 꽃과 나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왕양명의 지인이 물었던 것처럼 꽃은 나와 관계없이 깊은 산속에서 피었다가 진다.


“마음 밖에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꽃은 산중에서 홀로 피고 집니다. 저 꽃이 내 마음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데 내 안의 꽃이 살아나는 것이다.

“저 꽃을 보기 전에 그대의 마음과 저 꽃은 아무 일 없이 그저 머물렀다. 그대가 저 꽃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서 꽃빛이 선명해졌다. 그러니 저 꽃은 그대의 마음 밖에 존재한 게 아니다.”


심즉리. 그 순간 내 안의 꽃이 꽃으로 존재하고, 너와 내가 길들여진다. 길들여지고 싶어진다. 너는 내게 그 순간의 ‘장미’가 된다. 나는 이제 어린왕자에게 여우처럼 말할 수 있다.




















“저길 봐! 밀밭이 보이니?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나한테 쓸모가 없어. 밀밭을 보아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좀 슬픈 일이지. 하지만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네가 날 길들인다면 밀밭은 내게 근사해질 거야. 밀밭이 너를 기억하게 해줄 테니까 나는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사랑하게 될 거야.”


나의 모든 ‘장미’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다. 길들여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