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Camino De Santiago
여자 혼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023.04.16~2023.05.18 (총 33일)
생장-산티아고-피스테라 (900km 도보 완주)
"아빠, 나 직장 때려치우고 산티아고 순례길 갈까 봐."
본인을 똑 닮아 유독 모험심 넘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 많은 딸에게 아빠는 말했다.
"가 봐, 숲에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프로스트의 시가 있어."
참 낭만적이다. 결혼까지 한 딸이 퇴사하고 배낭 메고 장장 800km를 두 발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혼자 떠난다는데 (심지어 우리 집안은 불교, 이 길은 예수의 12제자 중 성야고보의 시신이 모셔진 성당이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가는 길이다.) 말리기는커녕 "순례길 좋지~ 나도 참 가고 싶었는데." 하며 태평한 게.
대학 졸업도 전에 영국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며 잠깐 인턴 경험을 쌓으러 취직한 회사에서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대학 졸업도 하고, 내 팀도 꾸려 팀장이라는 어깨 묵직한 타이틀도 달고, 결혼도 하고. 지나고 보니 내 20대는 온통 회사였다.
퇴근하는 순간까지, 어쩌면 그 이후까지 한 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에이전시 마케터로 근 8년을 버티면서 겉은 그럴싸해도 속으로는 참 많이 곪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자다가 침대에서 핸드폰과 함께 굴러 떨어졌을 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액정이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핸드폰 깨진 것 같은데 이제 고객사한테 전화 못 오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어느 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 큰 지장은 없지만 간간히 불안감이 극심해져 오는 공황장애가 생겼고, 자다 깨면 노트북을 켜고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기면서 일과 삶의 분리가 어려워지던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안 힘든 직장인 어딨겠냐마는 유독 생각이 많고 예민한 나는 남편과 함께 주말마다 사람들을 피해 섬여행으로 시작해 산으로 들로, 바다로 강으로 캠핑을 떠났다.
주말이 되면 더 바삐 움직이려는 나를 보며 남편은 제발 좀 쉬라고 해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나는 책임감과 열정이 매일매일 짓누르는 걸 견뎌내면서 충전 단자가 고장 나버린 기계처럼 그저 버티고만 있었다.
웃기게도 이 상황을 탈피하려 퇴사를 마음먹으니 내가 우리 회사, 이 일, 팀원과 동료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벅차게 느껴졌다. 내 청춘을 바친 회사니까 이상하게 퇴사를 고민할수록 나는 떠날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스스로가 가여웠다.
현재의 심각한 상태를 사내 면담으로 털어놓은 나에게 주어진 한 달의 시간. 누군가 안식월이 주어졌으면 안식이나 할 것이지 왜 사서 고생하러 가냐고 물을 때마다 이렇게 답했다.
순례길 가면 몸이 너무 힘들어서 마음의 힘듦이 잊힌대요.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한 달 동안 몸을 혹사시키면 이 생각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근데 웬걸. 하루 6시간 이상을 걸어 너덜너덜해지는 발목부터 배낭이 짓누르는 어깨와 허리, 골반, 걷는 내내 스틱을 꽉 쥐고 있던 손목 등 안 아픈 곳 없이 내일 눈뜨면 다시 걸을 수 있을까 하는 고통 속에서도 한평생 가장 마음이 안정된 한 달이었다.
마음의 힘듦이 잊히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기쁨과 긍정으로 가득 차는 나를 발견하면서, 혼자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떠난 것이 무색하게 혼자일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말을 걸고, 누구와도 친해지는 나에게 건넨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눈 뜨면 걷고, 마을에 도착해서는 짐을 풀고 쉬고 다음 날 다시 걷는 단순한 삶. 그 과정에서 만나 각자의 인생을 마치 오래된 친구들처럼 나누는 사람들. 지금도 이 심플한 삶과 사람을 잊지 못해 아직도 일상을 지내다 간간히 그곳 생각에 잠겨버린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길 위에서 '좋은 길 돼라'는 뜻의 부엔 까미노 (Buen Camino)를 외치는 곳. 이름도 나이도 출신지도 모르면서 서로의 컨디션과 발 상태를 체크하는 곳. 누구와도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 하며 왜 이 길을 택했는지, 뭘 얻고 있는지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곳.
까미노를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는 사람이 없다며, 이 길을 심하게 그리워하는 까미노 블루 (Camino Blue)라는 말이 있는 매력적인 여정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