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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순례길 전, 24시간 파리 여행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by 김로지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음먹었다면,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기 위해 어디서 출발할 건지 정해야 한다. 한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가장 잘 알려진 길은 [프랑스길]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프랑스의 생장 (Saint Jean de Pied Port, 파리에서 기차 타고 약 4시간)이라는 작디작은 마을에서 출발한다.


휴가로 주어진 시간은 38일, 왕복 비행 약 31시간을 제하면 할애할 시간은 36.5일도 안되었다. 9년 만에 반가운 파리에 도착했다고 해도, 순례길의 일정을 줄일 순 없었기에 24시간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두 번째 까미노를 온다면 시작 전 파리를 여행하지도, 끝나고 포르투를 여행하지도 않고 온전히 까미노에만 있다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혼자였던 로맨틱한 에펠탑 앞



긴 휴가가 주어지자마자 미루고 싶지 않아 한 달 후로 항공권을 발권했다. 평소 운동이라고는 정말 가끔 등산 정도만 해왔기에 800km를 걷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대충 짐작 정도만 할 수 있었다. (오히려 km에 대한 감이 없었기에 무작정 한 달 후 떠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무튼 본인의 체력 때문에 준비 기간을 가지려 먼 훗날로 계획하는 분이 있다면, 어차피 힘들고 어차피 적응할 것이기 때문에 사전 연습이 안되어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런저런 걱정 많겠지만,

발권부터 하면 어떻게든 됩니다.



연습 날, '오늘은 10km를 걷고 뻗었다.' 고 일기장에 적혀있었다. (순례길 하루 최대 기록: 42km)



한 달 뒤 장장 800km를 걷는 대장정을 앞두고 듣도 보도 못한 여행 준비가 시작됐다.


캐리어 대신 배낭을 장만하고, 물집 방지를 위해 두툼한 양말 2개를 신어도 딱 맞는 편안한 신발을 찾아다녔다. 해를 가릴 수 있는 넓은 등산 모자와 방수가 잘 되는 바람막이를 구입하는 일도, 풀착장을 하고 연습 삼아 산책을 나가는 것도 화장기 없는 얼굴로 바깥출입을 잘하지 않는 치장에 진심이었던 나에겐 세상 낯선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가까운 거리도 차를 타고 이동했던 사람으로서 이건 내 인생을 건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잘 보면 프린트한 떡과 과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순례길을 준비하는 기간은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가족, 지인들의 마음을 한껏 느낄 수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돼지저금통에 100유로까지 꽂고 스페인 산신들 초대해 무사 기원제를 준비해 준 친구들의 서프라이즈, 배낭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행운의 2달러나 손수건을 선물해 준 동료들 덕에 정말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웃는게 웃는게 아니에요 진짜루



혼자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관광이 아닌 배낭여행.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어찌나 긴장이 됐는지 배낭뿐이라 위탁 수화물 부칠 일도 없었는데 줄을 서있다가 허둥대고,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불안한 마음에 남편과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급하게 수속 밟고 체크인을 마쳤다.





탑승을 기다리며 혼자 멍하니 앉아 있자니 이 무모한 도전이 새삼 실감 나면서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30대 초반이었지만 8년 동안이나 한 곳에서 직장 생활을 해왔기에 오롯이 나를 위해 보내는 한 달은 대학생 이후로 처음이란 게 믿기질 않았다.


국적기 기내식은 마지막 한식이겠거니 싶어 야무지게 먹고, 비행기에서 잘 자지 못하는 나는 맥주와 와인을 마시며 뜬 눈으로 14시간을 보냈다.



공항과 지하철에서 나와 처음으로 마주한 파리



2023년 4월의 프랑스는 연금개혁 파업으로 철도와 교통에 정말 문제가 많은 때였지만 무탈하게 테제베 (TGV)로 이동할 수 있었고, 묵기로 한 친구네까지 한 번의 환승이 필요했지만 워밍업 겸 20분 거리를 걷기로 했다.


밖으로 나오니 저녁 9시인 시간에도 꽤 밝은 하늘.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파리이니 핸드폰에 리드줄까지 걸고 가방끈 손에 꼭 쥐고 씩씩하게 그냥 동네 걷는데 나 진짜 너무 감격스럽네.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에. 내가 빠리에 혼자 있다니



이 날 약속이 있어 나가니 혼자 편히 자라고 잠옷까지 준비해 둔 친구. 아마 원룸인 공간 편히 쓰라고 배려해 준 것 같아 눈물 나게 고마웠다.


새벽부터 일어나 서울↔파리 14시간 비행에 숙소까지 다시 한 시간 넘게 이동했으니 거의 24시간 잠 한숨 못 자고 깨있는 셈이었다. 시차는 무슨, 씻고 바로 기절했는데 눈뜨니 화창한 날씨. 와우 나 파리잖아!



산악대장 김로지



친구한테 사진 찍어 보내니 산악대장 엄홍길의 뒤를 잇는 것 같다고 했다.


사실 4월이라 날씨가 더 좋지 않을까 싶어 파리에서만 입고 버릴 원피스까지 고민했다가 괜히 배낭 무게 늘리지 말자고 안 쿨하게 포기했는데, 날씨가 너무 쌀쌀했기 때문에 원피스는 무슨 기모후드+경량패딩+바람막이로 아주 따땃하게 돌아다녔다.


나도 내가 이런 차림으로 패션의 도시 파리를 횡보할 줄은 몰랐어요.





내일은 순례길의 시작점인 생장으로 이동하는 날이라 주어진 시간은 24시간.


친구 퇴근하고 저녁에 만날 예정이라 약속 전까지 대중교통 없이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루브르 박물관 찍고 한참을 걷는데 그냥 꽃집을 봐도 예쁘고 카페를 봐도 신나고. 예전 왔을 때 들렀던 DEUX MAGOTS (헤밍웨이가 좋아했던 카페) 발견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루브르 입장은 사치지. 맑은 파리를 기대한 것도 사치였다. 아침부터 계속 걷고 있는 데다 기온이 꽤 쌀쌀하게 느껴져 마레 지구 아무 레스토랑이나 들어가 주문한 치킨 퓌레 요리 (15유로/21,600원)


너무 친절했던 서버 분이 프랑스어 메뉴를 잘 못 읽자 친절히 모두 소개해주셨다. 삼계탕 맛이 나기도 하고 버터가 잔뜩 들어간 퓌레 너무 맛있고!



9년만에 만난 가게


9년 전의 김로지



몽마르뜨 언덕에 도착해 낯익은 이곳에 다다른 순간, 20대 초반의 나를 만났다.


취업 후 긴 휴가를 내기 어려워 이곳에 다시 오기까지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강산이 거의 한 번 변하는 시기 동안 나에게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어쩜 이곳은 그대로 일까.


밝고 생기 넘치던, 졸업 후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20대 초반의 싱그러운 나는 새로운 만남은 피하고 부정적이며 월급날만 기다리는 칙칙한 직장인으로 변해버렸다. 이곳은 도색을 다시 했는지, 날씨 때문인지 어째 더 선명했다. 슬펐다.



개선문 근처 CAFE DE PARIS



다음으로는 개선문을 걸어가 볼까- 하던 와중 갑자기 쏟아진 비에 지하철을 타고 개선문 근처로 이동해 카페를 찾았다.


비를 피하러 무작정 들어갔더니 나는 산악인이 따로 없는데 너무 고급진 분위기에, 사람들도 어찌나 우아하던지. 등산복 차림이 초라해 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서버가 달려와 "춥지? 안으로 들어와. 안에 앉을래?" 해서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감정선 왜 이래. 하여튼 혼자 있으면 별게 다 감동이다.


나갈 때 예쁘다고 까지 해준 서버님,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비가 멎은 뒤 개선문과 에펠을 봤다.



봉숭아 빛의 로오즈를 샀다.


다시 숙소로 가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꽃 한 다발을 샀다. 몇 년 전 파리에 혼자 와서 지내고 있는 옛 친구, 오랜만에 연락했는데도 반가워하며 방을 내어준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손질해 유리잔에 꽂아두고는 퇴근한 친구를 역 앞에서 만나 저녁 먹을 식당으로 향했다.



La Cuisine de Chezmoi



저녁 먹으러 잘 아는 중식당에 가자길래 '파리 마지막 끼니를 중식당에서..?'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던 게 무색할 만큼 너무 맛있길래 안 먹었으면 순례길을 치고 울 뻔했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밥을 먹이고 싶었단다.


엉트레 (전식)으로 새콤달콤한 오징어 무침, 그리고 고소한 그린빈 튀김, 밥이 술술 들어가는 곱창 볶음에 맥주까지! 파리는 중식인가



드디어 내일, 순례길의 시작점인 생장으로 간다.



피곤했지만 밤 에펠을 안 보고 가면 후회할 것 같아 추천받은 트로카데로역 (Gare du Trocadero)으로 혼자 향했다. 걱정했던 일들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 떠나온 지 고작 24시간도 안 됐는데 작은 것에 커다란 감동과 감사를 느낀 날이었다.


반짝이는 에펠 앞에 여기저기 키스하고 난리난 커플들 사이로 당당하게 사진 한 장 찍고 나왔다.


나도 한국에 남편 있다 이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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